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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기서 재발하지 말아 줘, 제발!

앤텔로프 캐년(애리조나)

by 온정

'앤텔로프 캐년'은 윈도우 배경 화면으로도 알려져 있는 매우 유명한 관광지이다. 특히 협곡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사진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 같은 책의 표지나 광고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이 경이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서, 여행자들은 주로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12시 전후에 몰린다.


빛이 새어들어오는 엔텔로프 캐년 (출처: Wikipedia)

앤텔로프 캐년은 여행자가 개별적으로 들어갈 수 없고, 나바호 인디언들이 진행하는 투어를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했다. 우리도 1시 투어 참여하기 위해 무려 5개월 전에 예약을 했다.


투어는 사무실에 모여서 다 같이 트럭을 타고 엔텔로프 캐년까지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주차를 한 뒤 별 것 없는 근처를 서성거리며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에어컨으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차 안에서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 다리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무릎이 살살 시리고 허벅지가 아파왔다. 그냥 가볍게 걷는 수준인데도 두 다리를 지탱하는 것이 어려워 쩔뚝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횡문근융해증이 재발하려는 듯했다. '횡문근융해증'이란, 갑작스럽게 과격한 운동을 했을 때 근육이 녹으면서 생기는 병이다. 이 설명으로만 봐서는 근육이 다친 것, 즉 물리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이 병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따로 있다. 녹은 근육 속에 있는 독성 물질들이 혈액 속으로 스며들면서 신장병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혼여행 약 5개월 전, 나는 체력을 키울 겸 헬스장을 등록했다. 결혼식과 신혼여행 일정을 씩씩하게 소화해내기 위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어간 스피닝 수업 첫 시간에, 미련할 정도로 너무 무리해버렸다. 뭐든 이 악물고 끝을 보는 습관이 독화살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내가 다리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죽어라 페달을 돌리고 있을 때, 내 옆 사람은 너무 힘들었는지 도중에 포기하고 수업을 나가버렸다. 그 순간 나는 '나도 이렇게 끝까지 하는데. 의지박약이네...'라는 생각을 하며 그 사람을 조금 비웃었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그 사람이 얼마나 현명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한심했는지에 대해 한참을 반성했다. 비웃을 건 또 뭐람.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오만함이 너무도 부끄러워졌다.

운동을 한지 이틀 째 되던 밤엔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팠고, 그다음 날에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결국 응급실에 갔다가 그 길로 입원을 해서 치료를 받았. 퇴원은 금방 했지만, 정상적인 다리로 돌아오는 데까지는 두 달 남짓 걸렸다. 그마저도 재발률이 매우 큰 병이라기에 결혼식 때 까지는 웬만하면 걷는 행위 자체를 피했다.


이 정도 조심했으니 여행 중 가벼운 운동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식 때 신은 높은 굽의 구두와 자이언 캐년 트래킹, 그리고 컨디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다리에 또 탈이 나려는 듯 보였다.


그 병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지, 그 병을 앓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또 방치했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기에 너무 두려웠다. 내가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 온 신혼여행인데, 샌프란시스코는 가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미국 응급실에서 병원비로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전조증상이 나타난 것뿐인데도 그저 막막하고 두려웠다.


우리가 이번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기대했던 곳 다름 아닌 이 곳, 앤텔로프 캐년이었다.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보며, 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투어 포기하는 게 어떨까?"

나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뜨거운 태양 아래 엉거주춤 서있었다. 미련해서 얻었던 병이지만, 엔텔로프 캐년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미련해지고 싶었다. ‘괜찮지 않을까?’라는 문장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번 투어까지만 조심해서 다니고, 이 다음 일정부터 한참 동안 안 걸으면 괜찮지 않을까? 그랜드캐년은 내가 가봤던 곳이니까, 아쉽지만 오빠 혼자 트래킹 하면 되고…. 라스베가스는 도시니까 휠체어라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엔텔로프 캐년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만이라도 보고 싶어… 이대로 돌아설 수는 없어.”


아름다운 엔텔로프 캐년을 앞에 두고, 나는 판단 능력을 잃어버렸다. 오늘 받기로 한 벌을 내일로 미루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죄인처럼, 찜찜한 마음을 지닌 채 고집을 부렸다. 내 말을 들은 남편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결론을 내렸다.


“혹시 갔다가 못 걷게 되면, 내가 업어줄게! 가자!”


우리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사무실 한켠에 붙어있는 불편한 벤치의자에 억지로 엉덩이를 붙이고는 투어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음 무거운 그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한 남자분이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을 모아 인솔을 하기 시작했다. 쩔뚝거리며 따라간 주차장에는 하얀색 픽업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트럭 뒤 쪽의 짐칸에는 관광객들이 마주 보고 앉도록 두 줄의 의자가 붙어있었는데, 이 트럭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서 왠지 다리가 나을 것만 같았다. 먼저 트럭에 올라간 남편의 손을 잡고 읏챠,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내 옆에 앉은 흑인 여성분께 찡긋 눈인사를 했을 정도로 갑자기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태운 트럭이 한참 동안 출발을 하지 않았다. 얼른 이 트럭 뒤에서 오프로드를 달리고 싶은데. 답답한 마음이 들 때쯤 인솔자가 오더니 운전석에 타지 않고 우리 쪽으로 왔다.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중 ‘Get off’라는 말이 귀에 스쳐 지나가고,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 트럭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픈 다리를 이끌고 트럭에서 내려 사람들을 뒤따라 사무실로 갔다. 그리고 직원으로부터, 엔텔로프 캐년이 갑자기 점검을 하게 되어 출입이 불가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미국의 다른 국립공원과 마찬가지로 엔텔로프 캐년에서도 가끔 이런저런 사고가 발생하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면 고립될 수도 있는 지형이라 투어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고 듣긴 했다만, 우리가 간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았다. 정확한 이유를 알려달라 해도 직원은 끝까지 에둘러 답하기만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환불 절차를 밟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도 마지못해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환불 서류를 받아 든 남편과 나는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을 서성였다.


터덜터덜 사무실을 빠져나와 차에 탔다. 하지만 조금 벙쪄있던 우리는, 이내 기운을 차렸다. 내 선택과는 반대의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잘됐지 뭐, 욕심부렸다가 더 아파졌으면 어쩔 뻔했어. 오늘은 빠르게 모뉴먼트 밸리로 가서 오랫동안 그 풍경을 즐기자.”


이 타이밍에 투어가 취소된 것은 더 이상 미련하게 살지 말라는 하늘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커버사진/ 나를 설레게 했던 픽업트럭. 금방 내려야만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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