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랜 캐년 댐에서 말발굽 협곡은 차로 10분 거리였다. 중간에 워낙 여기저기로 많이 새긴 했지만, 드디어 우린 목적지인 말발굽 협곡에 도착했다.
말발굽 협곡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20분가량 걸어가야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이 20분이지, 사막에서 걷는 그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오죽하면 주차장에 “Take water!”, 물을 꼭 챙겨가라는 빨간 표지판이 걸려있고, 글 아래에는 한 사람 당 한 병씩 챙겨가야 한다는 그림까지 친절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표지판은 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었다. 주차하고 들어가자마자 말발굽 협곡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 기대하고 아무런 준비 없이 나섰다가, 중간에 탈진해서 픽픽 쓰러지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고, 그러면 큰일 나겠다 싶어 서둘러 차에서 물을 세 병 챙겼다.
우리는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오렌지색 땡볕 아래에서 오렌지색 모레 언덕을 무겁게 걸었다. 가는 길은 잡초들만 무성한 황무지에 가까웠기에 이 근처에 그런 경관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말발굽 협곡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찬 우리는 힘을 냈다. 그렇게 모레 길을 지나고 나니, 얇은 빵을 겹겹이 쌓아 만든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얇은 암석이 층층이 쌓여있는 특이한 지형이 나타났다. 그 지형을 밟으며 좀 더 걸으니 드디어 저 멀리에 푹 패여져있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 다큐멘터리의 연출처럼, 좀처럼 쉽게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협곡이 우리의 애간장을 태웠다.
"이런 곳에 말발굽 협곡이 있다고...?! 대체 어디....?"
사람들이 몰려있는 절벽 쪽으로 다가가자 조금씩 협곡의 모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맞이한 경관은, 신비함, 그 이상이었다.
말발굽 모양의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콜로라도 강이 원형으로 흐르며 휘감고 있었다. 이렇게까지나 깊게 바위를 깎기까지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까. 진한 코발트블루 색을 지닌 강에서는 그 물결을 따라 초록빛 띠가 춤추고, 그 규모를 비교해주듯 개미만큼 작은 보트 하나가 강물을 지나가고 있었다. 웅장함 안에 담겨있는 그 섬세한 색의 조화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이 곳에는 안전망이 전혀 없어서뻥 뚫린 풍경을 있는 그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절벽 근처에 서면콜로라도 강 목걸이를 한 거대한 말발굽 바위가 눈 앞에 펼쳐지며 우리를 반겼다. 그 경관을 둥그렇게 둘러싼 전망 절벽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모습으로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가까이 가야만 말발굽 협곡의 모양을 온전히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절벽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을 찾아 목숨을 걸고 인증 사진을 찍고 있었다. 쫄보인 우리는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비장한 표정을 하고 낮은 포복을 유지하며, 거의 기어가다시피 전진했다. 그 높이가 어찌나 높던지, 다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어, 딱 거기까지만 가자’, ‘안돼’, ‘위험해’, ‘조심해’ 따위의 말들을 속사포 랩처럼 뱉어내며, 우리도 겨우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곳에서 찍은 사진인데도, 지금 다시 보면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여서인지 이 곳은 지금까지 들렀던 장소들 중에 가장 붐볐다. 특히 여행을 시작하고 거의 마주치지 못했던 한국인들이 이 곳에서는 많이 보였다. 난 해외여행 중에 한국인이 많은 장소를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말을 아끼게 된다. 외국어들 사이에 모국어가 들리면, 마치 확성기 켜고 얘기하듯이 증폭되어 들리기 때문이다. 왠지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들의 귀에 확장된 소리로 들어갈 것만 같아 신경이 쓰이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큰소리로 나온 우리의 속사포 랩은,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두다다다 튀어나왔다. 많은 한국 분들이 그 소리를 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사실 이런 위험한 곳에서의 용감함은 그리 자랑스러울 것이 못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용감하다는 허세를 부리다가는 크게 혼쭐이 날지도 모를 것이다.
'우리처럼 겁내는 게 맞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의 호들갑을 합리화했다.
아름답고도 아찔한 이 곳. 셀카봉을 이용하여 겨우 전체 모습이 보이는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다.
아름다운 말발굽 협곡을 여유롭게 둘러본 뒤 우린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가져간 세 병의 물을 이미 탈탈 털어 다 마셨지만 갈증이 멈추지 않았다. 차 뒷자리에 구비해둔 물을 마시려고 집어 들었는데, 페트병이 너무 뜨거워 물 안에 녹아들어 갈 지경이었다. 아쉬운 대로 뜨거운 물을 벌컥벌컥 마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멕시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알록달록한 멕시코 풍의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약간은 촌스러운 듯 이국적인 그 모습이 내 취향에 아주 딱 들어맞았다. 식당의 직원들 역시 남미계 사람들이라서, 정말 우리가 멕시코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큰소리로 흘러나오는 남미 음악이 너무나도 신이 나서 나는 또 앉은자리에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남편은 질세라 두 검지 손가락을 드럼스틱 삼아 테이블을 두들기며 박자를 맞추었다. 흥겨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우리 앞에 반가운 멕시칸 음식이 놓여졌다. 밥도 먹으랴, 동시에 춤도 추랴 밥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몰랐다. 대망의 엔텔로프 캐년을 갈 생각에 한껏 들뜬 우리는, 에너지를 탄탄히 보충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한 포크(?)만 더 먹자”라는 말을 반복했다.그렇게 큰 접시를 꽉꽉 채워 한 가득 나온 음식을 참 열심히도 먹었다.
주차장에서 협곡 가는 길, 마치 크레이프 케이크 같았던 지형
콜로라도 강이 굽이치는 말발굽 협곡. 생각 그 이상으로 거대했다. 그리고 사암의 질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