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뉴먼트 밸리(애리조나, 유타) 가는 길

by 온정

그제야 잠시 미뤄두었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주변에 약국을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차를 타고 조금 더 가서 겨우 마트 안에 딸려있는 약국을 찾아 들어갔다. 은 종류의 약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나의 근육을 달래줄만한 것은 크림 형태의 파스 뿐이었다. 수시로 발라줘야 할 텐데, 하필이면 긴바지를 입고 있을게 뭐람. 아픈 다리를 파들파들 떨며 겨우 반바지로 갈아입고는 다시 차에 탔다. 또 독박 운전을 해야 하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미안해, 오빠…”


남편은 백 번 괜찮다고 했다. 우리 둘 다 마음속은 많이 불안한 상태였지만, 서로를 있는 힘껏 격려하고는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파스를 온 다리에 덕지덕지 바른 채, 혈액순환을 위해 자동차 환풍구 윗 쪽으로 두 다리를 올렸다.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다리에 닿으며 파스와 손뼉을 쳤다. 이 시너지 효과에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는 듯했다. 달리는 우리의 빨간 렌터카 안은 화한 멘솔 향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나는, 물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 횡문근융해증의 치료법이 그저 ‘물 많이 마시기’ 뿐이라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며칠간 링거를 통해 몇 리터씩 몸에 수액을 넣고 수시로 화장실을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다. 피를 묽게 정화시켜서 독소를 빼내는 방식이다. 나는 절대 신혼여행 도중 돌아가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며, 차 안에 있는 물을 다 마셔버릴 기세로 페트병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문제는, 무심한 애리조나의 길은 쉽사리 화장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계속해서 경고를 졌다.
“오빠. 내가 최선을 다해서 참아보겠지만, 정 못 참겠으면 얘기할게. 길가에 세워줘. 어휴, 신혼여행 중에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다니... 미리 사과할게.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낫잖아?그치?”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말만 해. 내가 언제든 세워줄게. 근데 이 길은 정말 가면 갈수록 허허벌판밖에 안 보이네... 리개로 쓸만한 게 없어 보여... , 어쩔 수 없지. 내가 옷이든 뭐든 준비해서 심히 가려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계속해서 화장실 농담을 하고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만!’을 외쳤다.
“오빠! 계속 의식하니까 더 화장실 가고 싶은 것 같아. 그냥 조용히 가자.”


속으로 다른 생각, 다른 생각을 외치며 열심히 참았다. 남편과 나는 3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지만 아직 생리적인 현상에 대해 낯을 많이 가렸다. 혹여나 낯을 안가린다한들, 신혼여행 중에 허허벌판에서 남편이 가려주는 옷 쪼가리에 의지하며 볼 일을 봤다가는 남은 결혼 생활 내내 부끄러움에 이불을 걷어찰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다. 아무것도 없다.

다리를 생각하면 무한정으로 물을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화장실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눈도 잠시 붙여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바깥 풍경도 쳐다보다가 한계점에 다다를 때쯤이었다. 지평선 저 멀리 흐릿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계속 직진만 하다가 처음 좌회전을 해야 하는 구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이 직진이지 구불구불 제멋대로였던 길의 끝에, 아주 정직하게 90도로 꺾인 삼거리가 구글 내비게이션에 그려졌다. 무언가가 보인다는 자체로도 이미 흥분이 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삼거리를 노려보았다. 그곳엔 주유소가 보였다…! 하지만 허허벌판에 나타난 셀프 주유소와 화장실이 필연적인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방심하긴 일렀다.


빠르게 달려 주차를 하기 무섭게, 나는 앞만 보고 일단 뛰어들어갔다. 아, 그곳은 무려 마트와 쾌적한 화장실이 딸린 주유소였다.

‘이 것이 진정한 사막 속 오아시스구나…!’

나는 말로 표현 못할 환희를 느꼈다. 미서부 로드트립 중 만난 마트는 언제나 반가웠는데, 이번에는 타지에서 엄마를 만난 아이처럼 특별히 더 반가웠다. 마트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근심과 회포를 푼 나는 아주 가벼운 몸으로 나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과 아이컨택을 했다. 남편은 싱긋 웃는 나를 보며 그제야 안심을 했다.


우린 손을 마주 잡고 마트에 들어가 필요한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저 내일 아침 거리가 될만한 것을 찾아보았다. 난 여행 중에는 돈을 아낄 겸, 그리고 현지의 음식을 한 번이라도 더 먹을 겸 조식을 잘 신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에는 슬라이스 햄과 치즈가 아주 탐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날씨가 많이 더운데 신선 제품을 사도 될지 고민이 됐지만, 우리 차의 빵빵한 에어컨을 믿으며 샌드위치 재료를 집어 들었다.


목적지까지 앞으로 1시간 반 정도를 더 달리면 되었다. 거의 앉아만 있으니 아플 일이 없었지만, 자꾸만 다리에 시선이 갔다. 하지만 불안함으로 이 시간을 보내기엔 바깥 풍경이 너무 근사했다. 밀려오는 부정적인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내 시선은 풍경을 이루는 모든 것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매우 설레게 했던 표지판.

모뉴먼트 밸리로 가는 길. 그 유명한 ‘세 개의 돌’은 쉽사리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거대한 돌이라면 호텔이 다가올 때쯤부터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린 도착하기 30분 전부터 지나가는 모든 돌에다 대고 이야기했다.
“저 돌이 그 돌 중 하나인가? 아님 저게 그건가? 아, 대체 어떤 풍경일까? 너무 궁금해!!!”


여행 준비를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사진이나 검색만으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던 곳이 바로 모뉴먼트 밸리였다. 그랜드 서클 루트 중 가장 멀었기에 갈지 말지 많이 고민하게 만들었던 목적지이기도 했다. 대체 그 세 개의 돌기둥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이 먼 곳까지 오게 했을까. 노력에 비해 별 거 없어서 실망을 하진 않을까, 라는 걱정도 조금 들었다.


하지만 우린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세 개의 돌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암괴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세 개의 돌을 찾기 위해 집착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가는 길, 저 먼 곳에 기도하는 여자처럼 생긴 바위가 보였다. 그녀는 성스러운 기운을 내뿜으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 앞에 다가왔다가 지나쳐가는 모든 사암들이 각자의 세월과 사연을 담고 있는 듯했다.



커버 사진/ 모뉴먼트 밸리에 다가올수록, 온 세상이 주황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모뉴먼트 밸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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