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구름 조각에 걸쳐있을 때, 우린 드디어 모뉴먼트 밸리의 숙소 “The view hotel”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호텔 맞은편으로 가보니 전망대가 있었다.우리가 그토록 외치던 세 개의 바위기둥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목구멍이 턱, 하고 막혔다. 벌어진 나의 입은 흙빛의 텁텁한 애리조나 공기를 머금을 때까지도 좀처럼 닫을 수 없었다. 내가 마치 우주에 있는 어떤 별 하나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우린 그저 태평양만 건너왔을 뿐인데, 이 곳이 정녕 지구가 맞는 거야?”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위에, 거대한 바위 세 개가 삼각형을 이룬 채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상상 그 이상으로 웅장하고, 또 눈물 나게 아름다워서 현실감이 없었다. 저 거대한 사암들 사이로 카우보이를 태운 말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상상을 했다. 서부영화를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미서부 자연의 삭막한 아름다움은 푸릇푸릇하게 숨 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는 확실히 달랐다. 척박한 땅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숨결은, 매 번 나의 장기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서는 내 마음을 울렸다. 그 숨결이 지나간 자리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외심이 남았다.
이쯤에서 ‘더 뷰 호텔’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모뉴먼트 밸리는 나바호 인디언의 보호구역이며, 이 모뉴먼트 밸리 지역 안에 있는 유일한 호텔이 바로 ‘더 뷰 호텔’이다. 물론 이 곳은 나바호 인디언들이 운영한다.
이 ‘인디언’이라는 호칭은, 콜럼버스가 미국 대륙을 발견했을 때 ‘인도’로 착각하여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주로 Native American, 즉 미국 원주민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불린다고 한다. 이 글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디언'이라는 호칭을 선택했다.
바깥 풍경뿐만 아니라 이 호텔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고, 또 하나의 여행이었다. 우리가 모뉴먼트 밸리에 와서 한 것이라곤 이 호텔에 머무른 일 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충분했다. 호텔 내부에는 단 한 군데도 인디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로비에서부터 보이는 벽에 붙어있는 기하학적 패턴의 카펫들과, 인디언 형태의 작은 수제 인형들, 인디언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그린 액자들…..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을 녹아들게 했다. 우리가 묵을 방의 문을 열자, 방 안에서도 아기자기한 인디언 소품들이 우리를 따스하게 맞이했다.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약간의 퀴퀴한 냄새마저도 왠지 나에겐 포근함으로 다가왔다. 마치 시골의 오래된 할머니 집에 온 듯한 편한 느낌 말이다.
인디언의 역사는 참 슬프다. 백인 개척자들은 인디언들을 잔인한 방식으로 몰아내고, 이렇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터전을 빼앗았다. 그 덕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고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픈 역사를 지닌 채 이 곳에 남아있는 인디언들은 얼마나 서글플까.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가난을 피하지 못한 채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황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척박한 모뉴먼트 밸리의 땅이 왠지 인디언의 모습을 닮아 더욱 쓸쓸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더 뷰 호텔’은, 꿋꿋하게 본인들의 전통을 지켜내며 살고 있는 인디언들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인디언의 숨결을 담아 아기자기했던 더 뷰 호텔
“오빠, 저녁을 일찍 먹어야 소화시키고 일찍 잘 수 있겠지?” “배가 전혀 안 고프지만, 그게 좋을 것 같아.” 우린 짐을 풀고 호텔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운 좋게 모뉴먼트 밸리가 한눈에 보이는 창가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최고의 경치를 배경 삼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인디언 음식은 맛있었지만, 그전에 계속해서 물을 한가득 마신 데다 앤텔로프 캐년에 가겠다며 점심을 과식했던 터라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배불리 먹고 산책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나는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할 운명이기에 일찍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당 옆에는 “Trading post”라고 적힌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인디언들이 만든 공예품들을 파는 곳이었다. 밥을 먹은 뒤 그곳을 구경하며 나는 연신 입에서 튀어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평소 내가 좋아하던 느낌의 소품들이 죄다 모여있었다.
“오빠, 아무래도 난 완전히 인디언 취향인 것 같아. 여기 있는 거 몽땅 다 사고 싶어. 어휴, 진짜 큰일 났다. 이거 보여? 내가 평소에도 좋아하는 패턴들이잖아!”
구매 욕구가 화산처럼 솟구쳐 올랐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인디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전통 수공예품인 만큼 가격이 조금 있는 편이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신혼집 소파를 장식할 작은 카펫과 모뉴먼트 밸리가 그려져 있는 작은 도자기, 그리고 컵 밑에 받칠 코스터를 몇 개 구입했다. 평소 차와 맥주를 즐겨마시는 우리에게 코스터는 가성비 최고의 기념품이었다.
쇼핑을 마무리하고, 방으로 들어와 붉은색 커튼을 걷으니 석양이 지고 있는 모뉴먼트 밸리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테라스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그 광활한 대지를 또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 앞에 펼쳐지는 이 대자연 속에서는 여백의 미가 느껴졌다.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어도, 나의 감정과 생각들이 그 넓디넓은 빈 공간을 채웠다.
오늘 하루 동안은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이 바로 내 것이었다.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 기둥이 “난 항상 여기에 있으니 언제든 보러 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우린 하늘이 푸른빛에서 검정 빛으로 변하고, 그 위에 별들이 콕콕 박힐 때까지 오래도록 그곳에 앉아 있었다.
행복했다. 정말 온 마음 다해 벅차오를 만큼 이 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 뒤엔 불안함도 함께 따라왔다. 내 다리는 아직도 병을 잠재하고 있는지, 아니면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인지 대답이 없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지니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응급실에 갈 것을 대비해 휴대폰에 여행자보험 약관을 다운받아보았는데, 파일을 열어보니 몇백 페이지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괜히 더 막막해진 나는 휴대폰 화면을 꺼버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이 왠지 내 인생과 닮아 조금 슬펐다. 난 행복한 순간이 올 때마다, 이 순간이 끝난 뒤 언젠가 찾아올 불행을 먼저 걱정하곤 했었다. 혼자가 아닌 남편과 함께 이 역경을 무사히 이겨내고, 꼭 행복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내 인생, 온전히 행복함을 느껴도 괜찮다는 결론 말이다.
남편은 불안해하는 나를 토닥여주었다. 걱정에 잠들지 못할 것만 같았던 모뉴먼트 밸리의 밤, 나는 그 위로에 보답하듯 곤히 잠들었다.
DAY4
다음날, 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다소 쌀쌀한 공기가 느껴져서, 인디언 패턴이 그려진 담요를 몸에 두른 채 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드넓은 지평선 끝에 둥그런 해가 서서히 올라오고, 잠들어있던 온 세상이 황금빛을 받으며 깨어났다. 따스한 빛이 우리의 온몸을 감싸는 그 시간이, 마치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졌다. 대자연 앞에 경건해진 우리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그 시간에 임했다. 낭만적이고 경이로웠던 모뉴먼트 밸리에서의 일출은, 평생을 잊지 못할 모습으로 내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해가 뜬 뒤에도 내가 여전히 바깥 풍경에 취해있는 동안, 남편은 빵 사이에 양상추, 햄, 치즈 등을 끼워 샌드위치를 만든 뒤 요거트와 함께 건넸다. 칼이나 포크조차도 없어서 모든 재료를 손으로 찢고 얹어서 만든 샌드위치였지만, 어떤 고급 호텔의 조식도 이렇게 맛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이 아침을 더욱 완벽하게 만든 것은 바로, 나의 몸 상태였다. 잘 자고 일어나 보니 다리가 조금 가벼워진 것이다. 아마 다리를 거의 쓰지 않고, 몇 리터씩 물을 마신 덕분인 듯했다. 방심하면 안 되겠지만, 호전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내가 불안해할까 봐 지금까지 애써 괜찮은 척을 하던 남편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날 안아주었다. “무서웠지? 고생 많았어. 이제 앞으로 차차 더 좋아질 거야. 여행 끝날 때까지 조심하자, 우리.”
경이로운 일출을 감상하던 그 시간
우리는 이제 그랜드서클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대망의 ‘그랜드 캐년’을 앞두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신혼여행지를 미서부로 결정한 계기는 그랜드 캐년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보기 위함이었다. 막상 여행해보니 그랜드 캐년을 보기도 전에 이미 너무나도 근사한 모습들을 많이 마주해버려서, ‘가장 멋진 그랜드 캐년을 마지막 하이라이트로!’라던 나의 계획은 조금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이 여행의 주인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를 미국 땅으로 불러준 그랜드 캐년에서 대자연 여행을 마무리할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은 괜스레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