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드디어, 당신과 함께한 그랜드 캐년

그랜드 캐년(애리조나)

by 온정

내 인생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겨준 모뉴먼트 밸리를 뒤로 한 채 우리는 그랜드 캐년으로 향했다. 하루에 두 군데 이상 들르던 앞의 일정들과 달리 오늘은 오직 그랜드 캐년만을 목적으로 이동하고, 도착해서는 그랜드 캐년을 즐기고, 또 그 안에서 잠을 자면 되었다. 행복했지만 조금은 고됐던 로드트립 일정들 이후에, 그랜드 캐년 가는 길은 우리에게 마음의 여유를 안겨주었다.

세 시간가량을 달려 그랜드캐년에 가까워질 때쯤, 우린 ‘Little colorado river view point’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즉흥적으로 들어갔다. 주차장에서 입구로 걸어가는 길에 인디언들이 장신구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매대 위에는 보헤미안 스타일에 어울릴 법한 귀걸이, 목걸이 등이 알록달록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에이, 이런 스타일은 사봤자 막상 한국 가면 안 하고 다닐 거야.’
괜히 홀려서 지갑을 열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중에서도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귀걸이가 하나 있었다.
“이거 정말 예쁜 것 같은데, 기념품이라 생각하고 하나 사는 게 어때?”
남편은 내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 귀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계속 고민하고 있는 나를 향해, 인디언 아주머니께서 미소를 지으며 그 귀걸이를 손에 건네주셨다. 둘의 꼬드김에 넘어가버린 나는 마지못해 귀걸이를 덥석 받아 들었다. 막상 내 손에 올려놓고 나니, 이 드림캐쳐 모양의 영롱한 귀걸이가 왠지 행운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에고, 오빠. 안 되겠다. 이거 사야겠어.”


인디언 아주머니께서는 귀걸이를 포장해주며, 드림캐쳐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적힌 종이를 함께 건네주셨다. 그 섬세함에 왠지 마음이 따듯해졌다. 행운을 돈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의미가 담긴 이 귀걸이를 산 것은 그날의 감정을 풍족하게 만드는 데에 더없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하루 종일 내 귀에 걸린 드림캐쳐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드림캐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악몽을 걸러주고 좋은 꿈만 꾸게 해 준다는 의미로 만들었던 토속 장신구로, 고리 모양의 수제 장식품이다. 고리 안에 그물이 쳐져 있고, 고리 아랫부분에는 깃털과 알록달록한 구슬 등이 달려 있다.
출처: 시사상식사전 by pmg


귀걸이를 산 뒤, 우린 리틀 콜로라도강 협곡(little colorado river gorge)을 보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협곡은 매우 투박하고 묵직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왠지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괴물(특히 ‘판타스틱 4’라는 영화에 나오는 바위인간)을 떠오르게 했다.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려운 땡볕 아래, 리틀 콜로라도 강은 흘러간 흔적만이 보이고 모두 말라버린 듯했다. 거의 단색으로만 이루어져 비교적 단조로워 보이는 협곡이었지만 그 깊이에서는 장구한 세월이 느껴졌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little colorado river gorge

산책하듯 가볍게 돌아보고 우린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눈 앞에서 보고 온 리틀 콜로라도강 협곡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면서 더 멋진 풍광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랜드 캐년에 거의 다다를 무렵부터는 지금껏 지나온 풍경들과는 전혀 다른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삭막한 풍경 위주로 지나왔다면 여기서부터는 초록 초록한 숲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캐년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는 더욱 울창해지고, 곰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숲이 펼쳐졌다. 워낙 장엄한 협곡이기 때문에 가는 길에서부터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양 옆에는 그저 나무들만이 울타리를 친 채 우리를 반겼다. 그렇게 숲 속을 달려서 우린 드디어 그랜드 캐년 사우스림의 첫 번째 뷰포인트인 ‘Desert view point’에 도착했다.

그랜드 캐년. 그 모습을 처음 접했던 날 이후로, 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장관을 감상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꿈꿔왔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그 상대는 이제 내 남편이 되어 나와 함께 그 꿈같은 순간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남편의 손은 내 어깨를 감싸고, 나는 남편의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우린 설레는 기분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함께 걸었다. 그랜드 캐년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했다.


이윽고, 드디어, 마침내, 그와 함께 마주한 그곳. 내 눈에 닿은 그랜드캐년의 전경은 여전히 수려함 그 자체였다.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 올라와 목구멍을 막아버린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우리는, 이내 무언가를 달성한 사람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편은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윤정아, 나랑 결혼해줘서,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와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오빠, 나랑 결혼해줘서, 그리고 날 믿고 이 힘든 곳까지 따라와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사람이 빼곡한 전망대 앞에서, 우리는 이 경관에 대한 감탄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Desert view point는 그랜드캐년이 시작하는 지점이라 그런지 이전에 보았던 중심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본격적으로 뾰족뾰족한 협곡들이 나타나기 전 평지의 모습부터 시작하여, 앞서 보고 온 리틀 콜로라도강 협곡의 투박한 바위들의 모습도 조금 보였다. 또 캐년 사이에 푸른 콜로라도 강이 구불구불한 형태로 선명하게 흐르고 있어 다양한 모습이 한데 어우러진 전망이었다. 우린 그랜드 캐년의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하며 Grand view point, Mather point를 모두 들렀다.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날렵하고 다채로운 그랜드캐년의 모습이 온전히 나타났다. 자연의 풍파가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모습인데도 질서 정연하게 우뚝 서있는 저 캐년들을 도대체 어떤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신의 영역이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니, 부족한 나의 표현력으로 이 경관을 묘사한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뿐이다.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가진, 그랜드 캐년의 Desert point
커버사진/ 그랜드 캐년

이토록 아름다운 그랜드캐년을 처음 마주했던 때, 나는 믿기지 않는 풍경을 앞에 두고 주체할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과 흥분으로 휩싸였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마주한 이곳에서의 감정은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모든 것이 새롭고 긴장의 연속이었던 신혼여행 중에 그나마 아는 곳에 왔다는 편안함과 드디어 내가 꿈꿔온 그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런 대자연의 모습을 보며 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조금 놀랐지만, 그랜드 캐년 일정은 우리의 신혼여행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과도 같았다. 남편과 나 모두 결혼식 직후에 떠나온 타지에서 첫 해외 운전에 적응하랴, 넋을 빼놓는 새로운 풍경들에 감탄하랴 정신이 없었던 터였다. 하지만 이제 앞으로 남은 그랜드캐년, 라스베가스, 샌프란시스코 일정은 앞선 일정들보다 여유로웠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익숙한 곳들이었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누적된 피로가 조금씩 밀려왔다. 우린 내일을 기약하며 일찍 숙소로 향했다. 그랜드캐년 공원 내부에는 지정된 숙박시설이 몇 개 있는데, 우리는 그중 하나인 El tovar 호텔을 예약했다. 오픈한 지 100년이 넘은 이 곳은 산 한가운데의 산장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통나무로 이루어져 있는 어둑어둑한 내부가 펼쳐지고, 로비에 있는 오래된 소파들과 벽난로가 그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고즈넉한 분위기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평소 여행을 할 때 숙소에 큰 투자를 하지 않는 내게 국립공원 내부에 있는 숙소를 예약하는 것은 꽤 큰 결심을 필요로 했었다. 오래된 건물에 시설도 좋지 않았지만 가격은 꽤나 비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뉴먼트 밸리에서의 The view 호텔과 그랜드캐년에서의 El tovar 호텔 모두 미국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전주 한옥마을에 아무리 시설 좋은 호텔이 있다 해도, 한옥집 온돌 바닥에서 밤새 배기는 허리와 엉덩이를 두드리며 불편하게 보내는 하룻밤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은 말해봐야 입 아프다.

그랜드 캐년 내부의 El tovar 호텔


앞서 말했듯 호텔에 도착할 때쯤 우리는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체크인을 하고 올라가려는데, 맙소사. 이 오래된 호텔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열흘짜리 신혼여행의 짐은 캐리어 4개를 꽉 채워 꽤나 묵직했고 내 다리는 온전치 못했다. 혼자 캐리어를 옮기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한 직원 분께서 우릴 도와주셨다. 겨우내 3층으로 짐을 옮긴 뒤 진땀을 뺀 나와 남편은 좁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 낡은 침대는 매트리스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 내가 걸터앉으면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았다. 우린 허공에 붕 떠있는 기분으로 양팔 벌려 누운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순간 언제나 정적을 깨는 소리, 꼬르륵.

“오빠, 우리 저녁은 어떻게 하지? 검색 좀 해보자.”

숙소에 도착하면 근처에 식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주변에는 숙박시설뿐이었다. 결국 우리에게 선택권은 이 호텔 1층에 있는 레스토랑을 가는 것밖에 없었다. 왠지 덜컥 밥값부터 걱정되는 나였다.
“호텔 레스토랑이면 비쌀 것 같은데….”
“먹을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차라리 잘됐다. 우리 안 그래도 피곤하니까 1층에서 저녁 먹고 푹 쉬자.”


우린 그럴듯한 합리화를 한 뒤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오늘 이 호텔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왠지 단 하나도 순탄하게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식당 예약이 꽉 차서 밤 10시에야 식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3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우린 좌절하며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고는 대혼란에 빠졌다. 자랑은 아니다만, 나는 체력이 약한 편인 데다가 한 끼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적어서 당이 잘 떨어진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하루에 한 끼라도 거르면 팔다리가 떨리고 눈 앞이 팽글팽글 돈다는 뜻이다. 음, 그러니까, 가끔 뉴스에서 어딘가에 갇혀서 며칠 동안 물도 밥도 안 먹고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사람들이 보도되곤 하는데, 그런 뉴스를 볼 때면 “내가 저기에 있다면 하루도 못 가서 당 떨어져서 제일 먼저 죽을 거야….”라고 말하곤 하는 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근처엔 식당이 없고, 선택권이 없는 것을.


일단은 방법이 없으니 그랜드 캐년이 펼쳐지는 숙소 앞으로 나가 최대한 시간을 때워보았다. 그 김에 일몰을 보자며 기다려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곳은 일몰이 보이는 방향이 아니었고, 산속의 날씨는 아주 빠른 속도로 추워졌다. 결국 우리는 터벅터벅 방으로 올라가서는 10시까지 시체놀이라도 할 요량으로 다시 철푸덕 누웠다. 그때였다. 미동 없이 눈동자만 굴리던 나의 눈에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무심하게 책을 펼쳤는데, 글쎄 식당 메뉴와 가격이 쓰여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는 내 눈 얖에서도 ‘고기’라는 뜻을 포함한 단어들은 왜 그리 선명하게 들어오던지. 영어를 곧잘 하는 남편이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고 ‘30분 내로 가져다 드리겠다’는 반가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 첫 룸 서비스를 맛보게 되었다. 테이블도 마땅치 않아 그 높은 침대 위에 음식을 올려놓고 불편한 자세로 저녁을 먹어야 했지만, 우린 이것도 정말 재밌는 추억이라며 깔깔 웃으며 돼지고기와 양고기 스테이크를 뜯었다. 음식 맛이 또 얼마나 일품이었는지, 절대 잊지 못할 맛이며 잊지 못할 순간이다.


배를 채우고 나니 밖에 나가서 별이라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다리가 아픈 나에게 엘리베이터의 부재는 너무 컸기에 오늘은 푹 쉬기로 했다. 작은 숙소 안에 달린 작은 창문을 빼꼼 쳐다보았지만 깜깜한 바깥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만이 흐르는 산속에서의 고요한 밤, 우리는 그랜드 서클 여행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다.




행운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던 드림캐쳐 귀걸이
그랜드캐년 Desert view 파노라마 샷
인생 첫 룸서비스, 침대 위에 올려놓고 먹은 양고기 스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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