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첫 룸서비스의 행복을 경험한 우리는 아침에도 그 감정을 느껴보기로 했다. 분명 1개를 주문했는데 둘이서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으니 인생 두 번째 룸서비스도 성공적인 셈이었다.
비록 허름했지만 맛집이었던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 우린 그랜드 캐년에서의 마지막 코스인 Bright angel trail로 향했다. 1시간가량 소요되는 트래킹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전날까지만 해도 트래킹을 할 수 있을지 긴가민가 했는데, 이틀 동안 호들갑을 떨어가며 다리를 아끼고 아껴서인지 다행히 많이 호전되었다.
우린 여유 있게 그 길을 걸으며 마지막 대자연을 살갗으로 느꼈다. 어쩔 수 없이 내 육체가 이 곳을 떠나야 한다면, 영혼이라도 두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곳들을 탐험했음에도 아직 여행이 5일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의 머리가 이 아름다운 곳을 최대한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눈과 코에 그 모습과 냄새를 담았다. 그러자 트래킹이 끝날 때쯤에는, 다음을 기약하며 기분 좋게 그랜드 캐년에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랜드 캐년, 안녕!”
마지막으로 담은 그랜드캐년
자, 이제 화려한 밤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이동하는 일이 남았다. 그랜드캐년으로부터 기본 5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중간에 점심도 먹고 다른 명소도 들르다 보면 7시간은 족히 잡아먹을 듯했다. 우린 어둑어둑해질 때쯤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을 위해 푹 쉴 요량으로, 중심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에어비앤비를 예약해놓았다. 이렇듯 오늘은 가장 장시간 동안 운전을 해야 하는 날이었기에 나는 패기 있게 먼저 운전대를 잡았다.
그랜드 캐년 근처의 푸르른 숲을 지나고 나니 비교적 단조롭고 심심한 풍경들이 이어졌다. 도시 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왠지 갈수록 제한 속도가 빨라졌다.(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다. 도시와 속도엔 별 관계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는 km/h 단위를 쓰지만 미국은 mi/h, 즉 ‘마일’ 단위를 쓰는데, 중간에 마을이 나타나면 제한 속도가 30마일(시속 약 50km) 정도로 낮아지지만 그 외 고속도로에서는 제한 속도가 60마일 이상(시속 약 100km)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점점 높아지던 표지판의 숫자는 끝내 75마일을 가리켰고, 모든 차들은 제한속도를 조금 넘어선 80마일 정도로 달렸다. 즉, 내 주변의 차들이 시속 130km의 속도로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로가 넓은 덕에 한국에서 느끼는 속도감에 비해서는 한결 안정적이었으나, 나는 내 꽁무니를 무섭게 쫓아오는 차들에 한껏 쪼그라들어서 오른발로 엑셀을 힘껏 밟았다. 내가 제한속도보다 조금만 더 느리게 달려도 뒷 차는 차선 변경을 한 뒤 내 차를 추월하곤 했다. 아, 약이 올랐다. 이렇듯 미국은 도로에 따라 운전하기 정말 쉬운 곳도 있었지만 어떤 곳에서는 한국에서의 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고속으로 달리며 나만의 추격전(?)을 벌인 끝에, 나는 이내 이 상황에 적응해버리고 말았다. 휴, 그런데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앞 유리를 통과하여 사정없이 들어오는 직사광선을 맞으며 운전을 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잔뜩 무거워졌기 때문이다.나같이 예민한 사람이 시속 130km를 달리면서도 졸릴 수 있다니…? 정말 새로운 경험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험이고 나발이고간에, 이건 무척이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화물차처럼 큰 차들이 사방에 쌩쌩 달리고 있는데 준중형차를 몰고 있는 내가 졸음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윗눈꺼풀은 아랫눈꺼풀과 뽀뽀를 하겠다며 아주 용을 썼다. 옆을 쳐다보니 남편은 말 그대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쌔근쌔근…. 응?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이야.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하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약 3초 동안 눈을 감았다.
1, 2, 3….
.....!!!!!!
그 숫자가 지나간 후 나는 마치 오랫동안 잠수를 하다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갑자기 숨통이 트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운전이라는 위험한 일을 하며 어떻게 잠이 올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내가 미쳤구나. 정말 미쳤어.’ 나는 계속해서 자책을 했다. 잠에서 깨기 위해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고, 껌을 꺼내서 씹고, 음악의 볼륨을 한껏 높여서 노래를 불렀다. 여전히 남편은 내가 부르는 처절한 노래의 영문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아주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사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당장 남편을 흔들어 깨워서 교대를 부탁해도 모자랄 판에, 머뭇거리고 있는 나 자신이 참 답답했다. 매일 나보다 운전을 많이 해온 남편이었기에 조금 더 쉬게 두고 싶다는 내 욕심이었다. 타인을 배려한답시고 하는 행동들이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독이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을. 휴게소에 들러 남편을 깨우고 상황을 설명하니,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남편도 나에게 일침을 가했다. “윤정아, 무조건 나를 깨웠어야지. 네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순간에 코 골면서 자고 있었던 내가 뭐가 돼.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내 잠이 대체 뭐가 중요하겠어.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너무 미안해지잖아... 그리고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무슨 일이 났으면 어쩔 뻔했어.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말아 줘, 응?”
졸음과 싸우며 운전을 하고 있던 순간에 세상 편하게 쿨쿨 자고 있던 남편이 괜스레 밉기도 했던 나였다. 하지만 남편을 깨우지 않은 것은 분명 나의 잘못이었다. 솔직히 음악 소리를 키울 때 남편이 알아서 깨주길 바라는 마음이 은근하게 들었으니, 말 다했다. 휴게소에서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나는 맛없는 스테이크를 질겅질겅 씹으며 이번 일을 머릿속에서 계속 곱씹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아무도, 나에게 이 정도의 지나친 배려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배려’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의 미련함에 대해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나친 배려는 배려가 아닌 것을. 이렇게 나는 또 신혼여행지에서 인생을 배웠다.
결국 오늘도 운전대는 남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국 땅을 한참 동안 달렸다. 이윽고 나타난 “Welcome to Nevada!” 표지판을 보니 이제 정말 라스베가스와 가까워진 것이 실감이 났다.
그 쯤엔 명소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영화 <트랜스포머>의 촬영지로 유명한 ‘Hoover dam’이었다. 마냥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던 글랜 캐년 댐과 비교했을 때, 후버댐은 굉장히 균형이 잘 잡힌 근사한 건축물이었다. 여전히 미국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적응하지 못한 우리는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후버댐이 애리조나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댐의 반쪽은 애리조나, 반쪽은 네바다에 속해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각 위치에 “Arizona time”과 “Nevada time”이 적힌 시계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함으로써, 우리에게 벅찬 감동을 남겨준 애리조나 땅은 정말 완전히 끝이 나버렸구나. 왠지 네바다 땅에 진입하여 달리고 있으면 금세 도시가 가까워져 버릴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후버댐 근처에는 아직 자연경관이 멋진 곳들이 눈에 띄었기에 우리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 주변을 맴돌며 갓길에 계속 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