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네바다)
예상했던 대로, 네바다 땅을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도시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도시 '라스베가스'에 도착했다. 미국식 가정집들이 주욱 들어선 곳 어딘가에 우리가 예약한 에어비앤비 집이 위치해있었다. 주차를 하고 숙소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를 반겼다. 어쩐지 그 고양이들은 나보다도 남편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강아지처럼 졸졸졸 따라다녔다.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어찌 됐든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이 바로 에어비앤비의 가장 큰 매력이다. 2년 전 혼자 라스베가스에 왔을 적에도 나는 에어비앤비에 묵었었다. 그때는 정말 집구석에 달랑 커튼 하나 쳐놓고, 그 안에 내 몸 하나 뉘일 촌스러운 침대 하나가 내 방의 전부였다. 아니, 커튼 한 장으로 구분되는 공간을 차마 '방'이라 표현하기에도 참 민망하다. 가방 둘 자리도 마땅치 않아 침대 사이에 껴놓아야 했던, 굉장히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좋았다. 커튼을 열면 호스트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미국 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사는 그녀는 나만큼이나 무뚝뚝한 딸이었고, 나에겐 친절했지만 엄마에게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건 똑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에어비앤비에서는 호스트를 만나지 못해서 조금 아쉬웠지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예쁜 집, 그리고 평화로운 주변 환경까지. 하루 쉬어가기에 대체로 만족스러운 숙소였다.
짐을 정리한 뒤 조금 출출해진 우리는 라스베가스 중심부(‘스트립’이라고 부른다.)로 나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복잡한 도심에서 주차를 걱정하기는 싫었기에 우린 ‘Uber’(*스마트폰 앱으로 승객과 차량을 이어주는 서비스. 택시와는 다르게 일반인도 본인의 차로 승객을 태워줄 수 있다.)를 불러서 탔다. 미국에 올 때면 택시보다 훨씬 저렴한 우버를 애용하게 되는데, 내가 만나본 우버 기사님들은 대부분 젊고 또 수다쟁이인 경우가 많았다. 좀처럼 미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없는 나에게 우버 기사님과의 대화는 항상 즐거운 시간이자 기회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기사님과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기사님은 우리의 여행에 대해 물어보시기도 하고, 눈 앞에 보이는 장소들에 대해 설명해주시기도 했다. 창 밖에는 어스름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스트립에 도착한 우리는 별천지 사이를 걸었다. 혼자 왔을 때 이 거리를 끝에서 끝까지 발이 터져라 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스트립 거리를 따라 호텔들이 쭉 있는데, 주요 호텔만 구경해도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호텔들에 전 세계 도시들의 명소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뉴욕뉴욕 호텔’의 자유의 여신상과 브루클린 브릿지라든지, ‘패리스 호텔’의 에펠탑과 개선문, 베네치아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베네시안 호텔’, 또 이집트 피라미드 모형을 재현해놓은 ‘룩소 호텔’ 등이 있다. 모두 실제 건축물만큼의 품질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이 작은 도시에서 세계를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롭다.
우리는 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라스베가스의 파리로 떠났다. (사실 떠났다고 표현하기엔 조금 유난스럽고, 걸어가니 금방 나타났다.) 개선문을 지나 패리스 호텔 내부로 들어가서 입장권을 구입하고는 에펠탑 전망대에 올랐다. 까만 하늘 아래 강렬하게 빛나는 스트립 거리가 펼쳐지고, 아주 먼 곳에 있는 낮은 건물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은 해가 지는 동시에 함께 고요해지는 동네들을 여행해온 우리다. 그러다 여기, 낮보다 밤에 더욱 번쩍번쩍해지는 곳의 중심에 서있으니 또 다른 설렘이 시작되었다. 아, 우린 이 영롱한 건물들 어딘가에 들어가서 불타는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셔라!’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마시다 보면 혹시라도 정말 내일이 사라져 버릴까 봐 관두었다. 우린 착하게 숙소로 들어가 고양이들과 놀다가 일찍 잠에 들었다. 평소 맥주를 사랑하는 우리로서, 이번 여행은 진정 인내의 연속이었다.
DAY6
고양이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IHOP이라는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향했다. 근처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내가 ‘무조건’ 가야 한다며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다. IHOP은 브런치를 파는 식당인데, 개인적으로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깃든 곳이다.
혼자 처음 LA를 여행했을 때였다. 라스베가스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밤새 이동한 뒤 아침 일찍 할리우드에 도착한 나는 게스트하우스에 들러 체크인을 했다. 그때 나는 피곤은 둘째 치고라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허기를 느꼈다. ‘LA는 인앤아웃버거가 유명하니까 먹어줘야지!’ 하고 검색을 해보니 할리우드 중심가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맛있는 버거를 먹을 생각에 설레는 발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LA 초행자의 실수였다. LA의 중심가는 안전한 편이지만 인적이 드문 곳은 꽤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뻘건 대낮인데 무슨 일 있겠어?라는 심정으로 인앤아웃버거를 향해 돌진하던 ‘이른 아침, 혼자 여행하는, 어린, 동양인, 여자, 배낭여행객’은 그 누구의 목표물이 되기에도 충분했던 것 같다. 처음엔 가만히 서있던 노숙자가 나를 발견하고 뒤따라오기에 나의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내가 속도를 내니 그 사람 역시 날 빠르게 따라오다가, 결국 내가 뛰기 시작하자 멈춰 섰다. 잔뜩 겁에 질려버린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주변을 돌아보니 괜히 모든 길거리의 노숙자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 섬뜩했다. 그 후, 다른 노숙자가 또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뛰었는데, 맙소사. 그도 뛰어서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조금 뛰다 보니 저 멀리에 인앤아웃 버거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가 사거리에 위치한 바람에 횡단보도를 마주해버렸지만, 금방 초록불이 켜진 덕에 난 헐레벌떡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이구나. 안도하는 마음으로 인앤아웃 버거의 문을 열었다. 기름 냄새 풍기는 그 공간이 어찌나 안전하게 느껴지던지. 숨을 헐떡거리며 드디어 해냈다는 표정으로 주문 카운터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매장의 직원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내 직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기, 30분 뒤에 오픈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망연자실했는지 모른다. 버거를 못 먹어서가 아니고, 유리문 밖 건너편엔 아직도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따라온 의중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막상 마주하면 “1달러만 주쇼.” 정도의 쉬운 부탁을 했을지도. 하지만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그 골목에는 사람이 없었고, 난 그 상황이 진심으로 무서웠다. LA에 사는 친구가 했던 ‘LA의 골목은 위험하다’는 말을 그제야 실감하고 있는 나였다.
쉽사리 매장을 나가지 못한 채 어떻게 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눈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다른 쪽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순간, 내 머릿속에도 초록불이 들어왔다. 그 길로 문을 박차고 나와 길을 건넌 뒤, 바로 앞에 위치한 건물로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제야 그는 포기했다는 듯 뒤돌아서 돌아갔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어대는 탓에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 직원이 내게 다가오더니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내가 들어간 곳이 바로 IHOP 건물이었다.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펼쳐보니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 메뉴들이 가득했다. 오믈렛을 주문하니 사이드 메뉴라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팬케이크 여러 장이 함께 나왔다. 또 테이블에는 팬케이크 전문점답게 알록달록한 통에 담긴 시럽이 네 종류나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그 따끈한 음식에 달달한 시럽을 올려먹었다. 배고픔과 두려움이 가득 차 한껏 서러웠던 나의 마음은, 폭신폭신한 팬케이크와 오믈렛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지친 나를 토닥토닥해주었던 IHOP은 오랜만에 먹어도 여전히 맛있었다. 그 당시 너무 많아서 남기고 떠나야만 했던 오믈렛과 팬케이크가 계속해서 눈에 아른거렸던 나다. 이번엔 남편과 함께 최선을 다해 접시를 싹싹 긁어먹었다. 나야 원체 먹는 양이 적지만, 성인 남성에게도 과식할 정도의 양이었으니 IHOP이 얼마나 든든한 브런치를 제공하는 곳인지는 알만하다.
배도 알차게 채웠겠다, 이제 다음 일정을 소화할 준비를 모두 마친 셈이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의 짐이 그렇게나 늘어날 줄은...
신혼여행기의 장르가 종종 스릴러로 변신하는 것은 유감입니다만,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