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네바다)
폭풍 같은 쇼핑의 후유증으로 피곤했지만 우린 저녁을 먹기 위해 스트립으로 가는 셔틀을 탔다. 라스베가스에는 그 유명한 셰프 ‘고든램지’의 레스토랑이 몇 개 있었다. 그중 우리는 고든램지 버거를 먹으러 갔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대기가 두 팀뿐인 것이다. 운이 좋다며 신나게 들어갔는데, 아니 글쎄, 음식을 주문한 뒤 햄버거가 나타나기까지 40분이라는 시간이 걸릴 줄이야. 그렇게 우리는 9시 반에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버린 우리의 뇌는 혀에 버거의 맛이 느껴지는 순간 눈에게 초롱초롱 빛나라며 즉각 지시했고, 허기로 텅텅 비어있던 우리의 위장은 육즙이 줄줄 흐르는 버거로 인해 든든히 채워졌다. 이번 여행 동안 인앤아웃 버거나 쉑쉑 버거는 먹지 못했지만 무려 ‘고든램지 버거'를 먹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꽤나 큰 자랑 거리가 되었다.
라스베가스에서의 일정은 참 짧았다. 쇼핑하느라 하루를 다 썼는데, 오늘이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에 우린 벨라지오 분수쇼를 구경하러 갔다. 벨라지오 호텔 앞에서 일정 시간마다 진행되는,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유명한 분수쇼였다. 영화 ‘타이타닉’의 구슬픈 OST가 흘러나오고 그 선율에 따라 물줄기들이 아련하게 춤을 추었다.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얼마나 높게 물줄기가 치솟던지. 그 낭만적인 광경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분수쇼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내 입에서는 감탄사가 아닌 죽을 사(死)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다리와 발이 또 많이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또 시작이야…? 이젠 그냥 다 포기하고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빠. 미안한데 우리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내 말을 듣고 놀란 남편이 분수쇼를 뒤로 하고 나를 부축했다. 그런데 하필 우리에겐 들를 곳이 있었다. 칫솔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칫솔을 사야 했고, 내일 먹을 아침밥도 사야 했기 때문이다. 다리가 아프지만 그 와중에도 양치와 아침밥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CVS(미국의 약국이자 편의점)로 향하는 길이 왜 그리도 멀게 느껴지던지. 우린 에스컬레이터가 딸린 육교로 올라갔다. 높은 곳에 올라와보니 유독 라스베가스의 거리가 더욱 다채로워보였다. 그와 대비되는 내 꼴에 씁쓸한 마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던 길, 내가 서 있는 계단이 한층 한층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발걸음에 내 무게를 싣는 것 자체가 걱정되는 것이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가 한 발을 내딛을 때 이런 느낌일까나.
그때였다. 남편이 나를 두고 먼저 성큼성큼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다. 그러더니 내게 등을 보인 채로 쭈그려 앉아 팔을 한껏 뒤로 젖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윤정아, 업혀.”
“오빠, 나 무거워.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나 바글바글한데…?”
스트립에는 줄을 서서 다녀야 할 정도로 사람이 넘쳐났다. 난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냉큼 거절했다. 하지만 거절당하고도 꿋꿋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내가 이것저것 가리고 따질 처지더냐. 이미 앞선 일정에서 얻은 교훈이 많은 터인데, 또 고집을 부리다 더 악화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결국 남편은 나를 업은 채 사람이 빽빽한 라스베가스 중심지를 당당히 걸어갔다.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는 남편의 강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남편의 마른 등판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마침내 CVS에 도착했고, 남편은 나를 두고 혼자 장을 봐왔다.
“휴. 이제 여기로 우버 불러서 숙소까지 가면 되겠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겠다.”
우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버를 불렀다. 그런데 이 앞에서는 정차를 못하는지, 출발 위치가 계속 멀찍이에 잡혔다. 몇 번을 시도해도 되지 않자 남편은 결국 다시 한번 등을 내주었다. 그 등에 업혀 얼굴을 파묻고 나니 왠지 소란스러운 라스베가스의 소리들이 귓속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동시에 내 마음에는 미안함, 든든함, 고마움 등의 감정이 한데 섞여 요동쳤다.
‘남편도 분명 많이 피곤했을 거야. 그 와중에 등 뒤에 업힌 내가 많이 무거웠을 거야. 여행 내내 나의 불안함을 감싸주느라, 나의 투정을 받아주느라, 계속해서 운전대를 잡느라, 나보다 훨씬 더 고된 시간을 보냈을 거야.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어. 불평은커녕 계속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그 머리에 뽀뽀를 해주고,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었어. 아, 난 전생에 대체 어떤 나라를 구했길래. 아, 우울했던 나의 인생도 이제 이 사람과 함께라면….’
눈물이 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날 업고 빙글빙글 돌린다든지, 당신은 전혀 무겁지 않다며, 본인은 하나도 창피하지 않다며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하는 남편을 보며 웃음이 터져버렸다. 업혀있느라 삐쭉 나와있는 내 엉덩이에 뿔이 날지언정, 그 시간은 진정으로 달콤했다.
신혼여행 중에 그놈의 다리 때문에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만. 갓 나의 남편이 된 따끈따끈한 이 남자와 함께 힘든 일들을 헤쳐나가다 보니 왠지 굳건한 믿음이 생겼더랬다. 나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함께 잘 이겨낼 수 있겠다는 믿음. 그것만으로도 신혼여행에서의 불안한 시간들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든든한 뿌리를 내려준 셈이다.
꽤 먼 곳까지 걷고 걸어, 우린 드디어 우버를 탔다. 불타는 라스베가스의 밤에는 곳곳에 시끄러운 앰뷸런스가 돌아다녔다. 그 차를 탈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숙소로 향했다.
정말이지 고단했던 하루가 지나가고 우린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자고 두 가지만 하고 오늘을 끝내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바로 속옷 빨래였다. 열흘 간의 여행이었지만 속옷을 10일 치 다 가져오는 것은 무리였다. 딱 반 정도만 가져왔기 때문에 오늘 꼭 빨래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남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럭셔리한 호텔은 남달라서, 큰 욕실 안에 세면대도 무려 두 개나 있었다. 우린 세면대를 하나씩 차지하고는 양치를 끝내자마자 자연스럽게 본인의 속옷을 꺼내와서 빨기 시작했다.
“엥…? 오빠. 뭔가 이상하지 않아?”
“왜? 뭐가 이상해?”
“아니, 오빠. 내가 오빠 옆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내 빤쓰를 빨고 있잖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우리 진짜로 결혼한 거 맞나 봐!!!”
빤쓰를 빨다 말고 갑자기 결혼이 실감 난 탓에, 우리는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아까의 근심은 진작에 날려버린 우리였다. 괜시리 다리의 통증 또한 함께 날아가는 듯했다. 미리 언급하자면, 다행스럽게도 이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내 다리는 아프지 않았다.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한 빨래가 끝난 뒤, 나는 뜨신물을 받아 오늘의 피로를 녹였다. 역시 럭셔리한 호텔엔 욕조가 있었던 덕이다. 럭셔리한 호텔은 야경 또한 끝내주었다.(자꾸 ‘럭셔리한’을 강조하는 이유는 내가 참 촌스러워서 그렇다.) 참 오래 보고 싶은 야경이었지만,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럭셔리한 호텔의 편한 침구에 누워,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포근하게 잠이 들었다. 그리곤 아주 달콤한 꿈을 꾸었다.
DAY7
이번 여행 중 경유지로서 그 역할을 톡톡하게 해 준 라스베가스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린 짧게 머무른 트럼프 호텔에 아쉬움을 남긴 채 체크아웃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우리와 함께한 빨간색 NISSAN. 그저 흔한 준중형차였지만 우리에겐 전혀 흔하지 않은 추억을 안겨준 이 아이와 작별해야 하는 순간 또한 다가왔다.
“고마워,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짜릿했어…!”
렌터카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린 차에다 대고 몇 번이나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쉬운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게 반납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미국은 렌터카가 워낙 일반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담당자는 차가 긁히진 않았는지, 반납 시간을 잘 지켰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차를 대충 쓰윽 훑어보더니 우리에게 영수증을 뽑아주었다.
“정말 끝난 거예요? 저희 가봐도 되는 건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번은 더 물어본 뒤에야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괜히 의심 살까 봐 차 구석구석을 카메라로 열심히 찍어놓았었는데. 필요 없는 일이었다.
공항으로 가기 전, 렌터카 업체가 모여있는 건물 안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우린 의자에 나란히 앉아 큰 캐리어 두 개를 이어 식탁처럼 만들었다. 그리고는 어제 CVS에서 사 온 샐러드와 요거트, 고든램지버거에서 포장해온 감자튀김을 그 간이 식탁 위에 올려두고 먹었다. 어제의 고생에 보답하듯, CVS표 샐러드는 저렴한데 양도 많고 심지어 굉장히 맛있었다. 역시 여행 중에는 마트에서 사 먹는 아침식사가 가장 흥미로운 법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카지노가 유명한 라스베가스는 공항마저도 카지노로 가득 차있었다. 라스베가스까지 와서 카지노를 안 해본 사람이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심지어 두 번째 방문인 나조차도 카지노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사실 '안 했다'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돈을 굴리는 것이 괜히 무서운 쫄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큰 맘먹고 공항 안에서 슬롯머신을 땡겨보기로 했다. 돈을 넣고 동그란 손잡이를 손에 쥐는 순간, 왠지 현금도 내 손안에 쥘 수 있을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드르륵, 슬롯을 아래로 내렸다.
“와!! 오빠, 이거 땡기는 느낌이 너무 좋아! 완전 재밌어!!!”
그렇게 쓴 돈은 무려 3달러. 역시나 모두 꽝. 우린 경험해 본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둘이서 쿵짝쿵짝 놀다 보니 탑승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이제 내가 사랑하는 도시, 샌프란시스코로 갈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