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최대한 촌스럽게 여행하라

라스베가스(네바다)-자이언캐년(유타)

by 온정

Day 2


물론 우리는 제대로 잠에 들지 못했다. ‘잤다’는 표현보다는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하지만 둘째 날부터 많은 스케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피곤함이 두 어깨를 짓눌렀지만, 여행이 시작되면 온전하게 살아날 나 자신을 너무 잘 알았기에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욕심 때문에 괜히 오빠를 고생시키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계속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는데, 고개를 돌려 남편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그런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본격적인 미국 여행에 앞서, 우리는 왠지 조금 소심해졌다. 다름 아닌 팁 때문이었다. 호텔을 나오며 ‘팁으로 얼마를 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 아닌 토론이 벌어졌다. 아니, '협상’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려나. 어쨌든 이 행위는 첫 며칠간 지속되었고, 팁을 줘야 할 시간이 다가올 때면 우리는 소곤소곤하며 딜을 시작했다.
“5불?”
“3불?”
“에이, 그럼 4불로 하자!!”
결혼식으로 한 시간 만에 엄청난 돈을 쓰고 온 사람들이, 또 방대한 대자연을 보러 가기 앞서 저런 귀여운 대화를 했다는 것이 조금 웃기지만 팁 문화가 생소한 한국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여행 중 어떻게 하면 팁을 건방져 보이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Thank you”라는 말을 하며 나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아무리 내가 미국 문화에 관심이 많고 그 문화를 좋아해도 내 핏속에 자리 잡은 유교문화는 이러한 미국 분위기에 자꾸만 어색함을 표했다. 촌스럽게 관광객 티 내기 싫었지만 말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빠져보면, 남편과 라오스 여행 중에 한 양식 레스토랑을 간 적이 있었다. 동남아의 물가가 저렴하니 고급스러운 곳도 한번 가보자는 취지에서였다. 당시 나는 라오스 야시장에서 구입한 코끼리 바지를 입고 자유롭게 여행하다가 레스토랑에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너무 고급스럽고 우아해서 내 추레한 옷차림에 민망함을 느껴 한층 작아졌다. 이 바지를 입고 라오스 어디를 걸어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마치 레스토랑 문 하나 열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다소 긴장하고 있는 우리에게 미국식으로 트레이닝을 받은 듯한 현지 서버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헬로! 하하, 하우즈 잇 고잉? 하하하…. (Hello! Haha, How’s it going? Hahaha….)”
미국 특유의 친근함과 쿨함을 책으로 배운 듯한 그의 딱딱한 말투와 행동에 우리는 첫마디부터 모두 어색해졌다. 그리고 문 하나 차이로 엄숙해졌던 나는 긴장이 풀리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국 이곳은 라오스인 것을….!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는 있어도 그 문화에 완전히 젖어드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영어를 잘하는 이 서버도 미국식으로 자연스럽게 주문을 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결국 이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미국 문화에 빠져있는 나지만, 여전히 미국 어딜 가도 들을 수 있는 “How are you doing?”에 “Good!” 한마디 대답하는 것이 그리 려웠다.
문화 차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이 곳에서 외지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색하고 모든 것에 서툴 수밖에 없다!’라는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여행을 좋아하고 평균보다 조금 더 다녔다는 이유로, ‘나는 여행할 때 좀 더 자연스러워야 한다’라는 허세가 종종 튀어나오곤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여행 중에는 익숙함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겪은 것을 또 겪더라도 약간의 낯선 그 느낌을 즐기는 것이 좋다. 그러니 허세는 집어넣고 그냥 촌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해야겠다.


우리의 로드트립 경로

우린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구글 맵으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첫 번째 목적지인 유타 주의 ‘자이언캐년(Zion canyon)’으로 향했다. 구글은 우리에게 한국어 음성으로 안내를 해주었고, “우회전”을 “뤠전”이라 발음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는 “뤠전”이 나올 때마다 그 발음을 따라 하며 깔깔 웃어댔다. 사실 설레는 여행을 시작하며 무엇을 보든 웃음이 안 터지고 어찌 배기랴. 코에 바람만 스쳐 지나가도 경박한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린 순전히 캐리어만 차에 실은 채 숙소를 떠났고,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사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이건 미국 고속도로 초행자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가는 길에는 마트는커녕 주유소 조차도 보이지 않았고 갈증이 나도 물을 마시지 못한 채 서너 시간을 내리 달렸다. 그렇게 오아시스처럼 찾아 들어간 월마트에서 우리는 35개 묶음의 물, 비상식량 등을 구입하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역시 어디를 여행해도 마트 구경은 참 재미있다. 그리고 허기를 달래주는 동시에 씹는 즐거움까지 주는 감자칩은 필수다.


이동 중에 볼 수 있는 흔한 미서부의 풍경들.


라스베가스에서 자이언캐년까지는 지도 상에서 약 3시간 거리였으나, 실제로는 도착까지 4-5시간이 걸렸다. 보통 이동 시간이 긴 여행을 할 때면 ‘길에서 시간을 버린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미서부 자동차 여행에서는 단 한순간도 버릴 것이 없었다. 그만큼 길을 가며 보이는 풍경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도로가 지평선을 따라 길게 뻗어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의 풍경이 달랐다. 언덕을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갈 때면 갑자기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으며, 산 사이의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다가 코너를 돌 때면 선물처럼 또 새로운 풍경이 짠 하고 나타나곤 했다. 마치 대자연이 우리에게 “끝난 줄 알았지? 아직 보여줄 것들이 한참 더 남았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장시간 운전을 하려면 피곤하니 둘이 운전을 교대해가며 눈을 붙이기로 했지만, 조수석에 앉아서도 우리는 잠을 청하지 못했다. 어느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지나치기 아쉬운 곳에서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그 풍경을 감상했다. 바로 이거다, 내가 꿈꿔왔던 여행.
이렇게 눈 호강을 하면서, 큰 봉지의 감자칩을 와작와작 까먹으며, 큰 소리로 콜드플레이의 노래를 부르며 지루할 틈 없이 달리고 또 달려 드디어 자이언캐년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한국에서 미리 구입해 간 국립공원 애뉴얼 패스를 보여주고, 땡볕의 주차장에 겨우 한자리를 찾아 주차했다. 그리고는 비지터센터로 가서 지도를 하나 집어 들었는데 꽤 많은 트래킹 코스가 적혀있어 조금 당황스러웠다. 국립공원 안에서는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가 유명한 코스인지 찾아볼 수 없었다. 고민하던 우리는 결국 우리는 소요 시간이 가장 적절한 ‘Lower/upper emerald pool’ 코스를 돌기로 결정하고, 셔틀버스를 탔다.


글, 사진 by 온정

커버사진/ 라스베가스에서 자이언캐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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