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다. 원래 계획은 자이언캐년에서 브라이스캐년(Bryce canyon)을 갔다가 카납(Kanab)에 있는 숙소로 가는 것이었는데, 자이언캐년까지 오는 데에 시간을 너무 많이 할애해버렸다. 브라이스캐년을 가기 위해서는 자이언캐년에서 잠시 구경만 하고 금방 길을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곳이 초행길인 우리에게 애리조나의 해는 야속하게도 너무 빠르게 졌다. 캄캄한 길을 운전하다가 위험한 상황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우리에겐 모든 목적지가 너무 소중했기에, 불확실한 위험은 무시하고 브라이스캐년을 고집하고 싶은 마음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브라이스캐년을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여행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더군다나 나는 여유 있는 여행을 가본 경험이 없다. 항상 짧은 시간 안에 한 군데라도 더 가기 위해 빡빡한 일정으로 계획을 짜곤 했었다.하지만 마음처럼 쉽다면, 그게 진정 여행이랴? 자고로 여행은 대부분 짜여진 계획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갈림길의 심판을 받게 된다.
평소의 나는 결단력이 정말 약한 사람이다. 결정 장애가 굉장히 심해서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선택을 고민하고 있는 그 1분 1초마저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만은 평소의 모습을 하나 둘 내려놓기 시작했고, 그 결과 '최대한 빠르게 선택하는 법'의 내공을 가장 먼저 쌓을 수 있었다. 물론 선택에 따른 결과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 후회가 될 수도 있고, 고생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항상 긍정의 주문을 외운다. “괜찮아, B를 선택했어도 좋았을 거란 보장이 없어. 그래도 A를 선택한 덕에 이거 하나는 얻어갈 수 있잖아?”
놀랍게도 이 주문은 항상 그 효과를 발휘한다. 아무리 쥐어짜도 얻어갈 것이 없어 보이는 A의 결과에도 결국 추억 하나는 보장이 되곤 한다.여행 중 고생했던 이야기는 꼭 사골 국물마냥 진하게 우려지고 한참 동안 술안주가 되기 마련이지 않는가.
이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들과 역경 속에서 더 영향력 있는 기억이 남곤 한다. 이젠 오히려 모든 것이 원활하게 진행되면 그만큼 기억 속에 깊게 자리 잡기 어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불완전한 이야기들이 하나, 둘 모여 진정한 여행이 되는 것 아닐까?
내가 외우는 '선택의 주문'이 일상에서도 말을 듣는다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여행 중에만 먹힌다. 여전히 나는 푸드코트 앞에서 저녁 메뉴를 고르다가 결국 고르지 못해서 빵을 사러가는 심각한 수준의 선택 장애를 갖고 있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동행자들을 이끌고 다닐 만큼 대담해진다. 어쩌면 나는 여행 자체를 좋아하는 것보다 여행할 때의 시원시원한 나 자신의 모습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선택 또한 저 주문처럼 속 시원한 해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브라이스 캐년은 다음에 다시 와서 가자. 우리 또 올 거잖아?”
결국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히려 언젠가 이 곳에 다시 올 명분을 만들어내고는 마음속에 ‘다음’이라는 씨앗 하나를 심을 수 있어 기뻤다. 이 씨앗이 자라고 자라서 꽃을 피울 때쯤 우리는 다시 유타를 찾을 수 있겠지.
여유롭게 이 곳을 즐기기로 결정하고 나니 조급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셔틀버스는 밖을 볼 수 있도록 넓은 창문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고, 천장에도 창문이 여러 개 있어서 그 사이로 미지근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빙글빙글 산길을 올라가는 버스에 앉아 따사롭다 못해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자니 꾸벅꾸벅 잠이 오기 시작했다.
“윤정아, 일어나. 우리 내려야 돼!” 머리를 쓰다듬으며 남편이 나를 깨웠고, 우리는 기분 좋은 노곤함을 지닌 채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자이언캐년의 풍경은 우리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초록 초록한 풀밭이 펼쳐져 있고, 많은 여행자들이 그곳에 앉아 식사를 하거나 광합성을 하면서 쉬고 있었다. 그 사이엔 잎이 풍성한 나무들이 우뚝 자라 있고, 중앙에 서서 빙 돌아보니 사방에 거대한 암벽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붉은 바위들이 대비를 이루어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신이 빚어놓은 듯한 이런 곳에 사람이 들어와 있어도 괜찮은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곳 대자연의 풍경은 경이로웠다. 마음 한 켠에는 두려움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신비한 경치를 보면서도 배꼽시계는 울려댔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여행을 시작하여 오후까지 멋진 풍경들로 열심히 주린 배를 채웠지만, 이제 정말로 몸에 음식을 충전해줘야 할 때가 왔다. 지도에서 레스토랑 표시를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패스트푸드점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버거, 샌드위치, 샐러드를 사고, 운 좋게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아 드디어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오빠와 이런 풍경 속에 앉아서 함께 버거를 먹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덕분에 평범하게 생긴 이 버거에서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맛이 났다.
자이언캐년/ 현실감이 떨어지는, 황홀한 식사였다.
제대로 된 첫 목적지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여유롭게 앉아있으니 슬슬 이 순간이 피부로 와 닿았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꿈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벌써 아쉬웠다. 최대한 열심히 내 눈에 풍경을 담고, 혹여나 잊어버릴까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평화로운 바람의 소리를 듣고, 또 열심히 이 곳의 냄새를 맡았다. 정말이지 황홀하고도 소중한 이 순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누가 보아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대자연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냥 둘이 함께 파란 하늘 아래에 가만히 앉아 좋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누구보다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