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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카납에서의 다소 엉뚱한 로맨스

카납(유타)

by 온정
Kanab 가는 길, 입이 떡 벌어지는 도로의 풍경

카납(Kanab)까지 열심히 달리고 달려서 숙소에 도착하기 20분 전, 남편은 드디어 운전대를 넘기고 조수석에 누워 곤히 잠이 들었다.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진 남편을 보니 너무 안쓰러웠다. ‘숙소 도착하면 토닥토닥해주면서 천천히 깨워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내비게이션이 유턴을 가리키는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큰소리로 그를 깨워버렸다. 작전 실패.


“오빠!!!! 미국 유턴은 어떤 신호에서 해야 되는 거야?!?!”


혹여나 미국에서 불법 유턴 딱지라도 끊을까 봐 한껏 쫄아버린 나. 덕분에 요란하면서도 다소 민망하게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앞에는 페도라 모자를 쓰고 양 손에 총을 든 카우보이 간판이 "이 곳이 바로 미서부이다!"라고 외치는 듯 서 있었다.


카납은 자이언 캐년과 앤텔롭 캐년 사이의 적당한 거점인 동시에, 숙박 시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정보를 보고 단순히 잠만 잘 생각으로 선택한 경유지였다. 그런데 숙소 바로 앞에서도 굉장히 크고 근사한 붉은 암석들을 볼 수 있었고, 우리는 예상치 못한 눈 호강에 또 한 번 행복해졌다.

'우리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바로 여행지로구나!'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여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었다.


긴 여정을 보낸 뒤에 들어간 숙소는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침대와 한 몸이 되고픈 충동을 억누르고,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체크인할 때 식당을 몇 군데 추천받았는데, 우린 그중 이 마을의 느낌과 닮은 아기자기한 미국식 식당을 선택했다. 식당 안에 들어가 보니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인들이었다. 덕분에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정도 차려입은 사람들은 여기 사는 사람들인 것 같고, 우리처럼 편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미국 내에서 여행 온 사람들 아닐까? 저 쪽 테이블은 가족 단위로 왔네! 역시 애들은 가족 여행이 지루한가 봐. 이럴 때 보면 애들은 전 세계의 풍경이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 “


한국말이 들릴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속닥속닥 거리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저녁 메뉴는 연어 스테이크와 파스타. 그리고 추가로 유타 주 현지 맥주를 시켰다. 더울 때마다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맥주를 드디어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테이블을 탁 치며 “한잔 더!”를 외치고 싶었지만 피곤했던 우리는 맥주 한 잔에도 노곤 노곤해졌다. 더군다나 이 식당에 여유롭게 앉아있기엔, 문 앞에 대기줄을 선 사람들이 배고픈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정 맥주가 고프면 마트에서 사 먹자며 식당을 나섰다.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하고 싶었는데 동네는 이미 어두컴컴해 뒤였다. CVS(미국식 약국 겸 편의점)도 문을 닫아버려서 맥주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반 강제로 일찍 숙소에 들어다. 이게 얼마 만의 휴식이더냐.


'미서부' 하면 딱 떠오르는 정석적인 이미지의 카우보이 아저씨

덥고 습한 우리나라의 여름과는 달리, 4월의 유타는 굉장히 건조했다.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한 채 여행을 떠나온 우리의 피부에는 점점 가뭄이 나기 시작했다. 손 껍질은 쩍쩍 갈라지고, 몸 구석구석에는 벌레를 물린 것처럼 벌건 자국이 올라왔다. 말 그대로 ‘긁어 부스럼’이기에 가려워도 긁지 못하고 참아야 했다.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에는 약국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르지 못한 채 갈라지는 피부를 쳐다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바디로션은 왜 안 챙겨 온 걸까.


신혼여행까지 와서 너무 초라해진 우리의 피부와, 피로에 퉁퉁 부어버린 손발을 보며 잠시 상상했다. 휴양지 해변가의 선베드에 누워, 누군가가 서빙해주는 칵테일(칵테일을 안 좋아하지만 왠지 이 장면에서는 칵테일이 나와줘야 할 것 같다.)을 한 잔 마시며 얼굴이 번지르르한 채 여유를 즐기고 있는 우리 둘의 모습을. 그리고 그 장면을 상상하는 순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겨울왕국'에서 눈의 형체를 가진 '올라프'가 태양이 뜨거운 여름 해변을 즐기는 장면처럼 말이다. 휴양지를 포기하고 이 곳에 온 우리의 선택에 더욱 확신이 생겼.


“우리, 정말 잘 온 것 같지?”


내 앞에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웃으며 로션을 아끼고 아껴 내 건조한 손등에 정성스레 발라주고 있는 남편이 있었다. 작은 것도 왠지 더 소중해지는 이 여행이, 적어도 우리에게는 쉬는 시간보다 훨씬 더 값지게 다가왔다. 이 여행을 하며 힘든 일은 계속해서 있었지만 그 역경을 함께 이겨내며 우리는 부부로서 한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일찍부터 숙소에서 쉬기 시작한 우리는 시차 때문인지 좀처럼 깊게 잠들지 못했다.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침대에 붙어있다가, 결국 나는 새벽 4시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는데 부시럭대는 소리에 남편도 덩달아 얕은 잠에서 깨버렸다. 그렇게 한밤 중에 별을 보러 나가겠다는 나를 위해,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카메라와 삼각대까지 챙겨서 함께 새벽 산책을 나가주었다.
대자연 여행 중 별을 보는 것은 내 로망이었다. 그래서 한껏 기대를 하고 밖으로 나갔지만 아쉽게도 막상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카납은 숙박시설이 모여있는 동네였는데, 여행자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밤새 조명을 켜 두었다. 새벽에도 밝게 켜져 있는 빛이 별들을 잡아먹어버린 듯했다. 말로는 괜찮은 척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지만 우리 둘 다 아쉬운 마음에 숙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사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어두운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굳이 위험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미서부 비행기표를 끊을 때쯤 라스베가스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크게 터졌었고, 때문에 여행지를 바꿀까 고민도 많이 했었지만 최대한 안전하게 다닐 것을 다짐하고 강행한 여행이었다. 이제 나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안전은 더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욕심부리지 말자, 그렇게 반쯤 포기하고 다시 숙소 쪽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오빠가 숙소 뒷 편의 마당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는 그쪽을 가리켰다.


“윤정아, 마지막으로 여기만 한번 들어가 볼까?”
“응? 숙소 바로 뒤 엔데 뭐 다를 게 있을까….?”


아무런 기대 없이 향한 발걸음이었으나, 그 으슥한 곳에서는 거짓말처럼 별이 쏟아져내렸다. 포기하고 들어갔으면 못 봤을 광경일 텐데, 예상외로 너무 가까운 곳에서 나의 로망은 현실이 되었다.
남색 도화지에 별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별들을 앞에 두고 넋을 잃어버린 내게, 남편은 별을 하나하나 콕콕 집어 별자리를 알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름 모를 수많은 별들 중에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유독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
우린 성공적인 새벽 시간을 보내고, 켈록켈록 마른기침이 나올 때까지 별을 구경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별의 여운 때문인지 우린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 결국 숙소의 통유리창으로 해 뜨는 모습까지 보고, 졸린 눈을 비비며 간단히 조식을 먹었다.




초점이 조금 흐릿하지만, 정확하게 보이는 북두칠성 별자리
노을지는 카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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