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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이언캐년 중심에 새긴 발걸음

자이언캐년(유타)

by 온정

야무지게 점심을 은 우리는, 부푼 배를 통 두들기며 여유롭게 트래킹을 시작했다. Lower/Upper emerald pool을 지나 Kayenta trail을 거쳐 내려오는 코스였다. 방문자센터에서 집어 들고 온 지도에는 코스 별 난이도가 세 단계로 나뉘어 적혀있었는데, 그중 우리가 가는 길은 난이도 '중'이었다.


몇 년 전 혼자 그랜드캐년에 갔을 때는 산 정상에서 내려보듯 전체적인 캐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신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 탁 트인 전망 덕에 광활함이 더욱 와 닿았지만, 한편으로는 ‘저 협곡 안 쪽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나?’라는 호기심 계속해서 라왔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이런 연유로 계속 인간 세상에 내려던 것일까.

런데 바로 자이언캐년에서 그것이 가능했다. 즉, 비교적 협곡의 아래쪽 서서 위로 그 모습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한눈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낮은 자세에서 이 곳을 하나하나 아껴가며 알아가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탁 트인 전망은 아니어도 확실히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마치 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속해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곳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트래킹을 하면, 정상에 올라가 파노라마 뷰를 감상할 수 있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신혼여행 중 혹사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적당한 길을 선택했다.

선글라스에 비친 자이언캐년

트래킹 코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길었고, 천천히 즐기며 가니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막상 emerald pool보다는 걸어가는 과정에서 저 멀리 보이는 암석들의 웅장한 모습들이 더욱 인상 깊었다. 다양한 형태로 삐죽삐죽 서있는 기암괴석들의 줄무늬들은 세월의 풍파가 만든 예술과도 같았다. 가로, 세로 층층이 비슷한 듯 교묘하게 다른 톤을 가진 주황빛 암석에, 깨알같이 자라 있는 초록 나무들이 색감의 조화에 정점을 찍주었다.


기분 좋게 산길을 걸어 가장 먼저 마주한 Lower emerald Pool은 암벽 위에서 얇은 물줄기가 쫄쫄쫄 떨어지는 곳이었다. 마치 배가 나온 것처럼 둥그런 형태의 절벽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우산 삼아 밑으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었다. 물은 마치 분무기 뿌리듯 흩뿌려졌고, 덕분에 우리는 그곳을 지나며 얼굴과 팔에 튀기는 작은 물방울들을 느 수 있었다.

Lower emerald Pool을 지난 뒤로는 꽤 가파르고 좁은 길들이 나타났다. 다리만이 아니라 두 손까지 동원된 네 발 등산이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이 등산복, 등산화에 지팡이까지 장착했는데 우린 너무 대책 없이 터라 좀 더 고생했다. 런 대자연 속에 들어오면서, 멋내자고 스니커즈를 신은 리의 발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 우 도착한 Upper emerald pool에서는 절벽 아래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볼 수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이 절벽은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그 높이가 높았다. 분명 저 절벽을 타고 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져야 할 것 같은데, 물이 젖어있는 흔적만 있고 막상 떨어지는 물은 보이지 않았다. 암석들이 군데군데 회색, 검정으로 변색되어있어 더욱 척박한 느낌이었다. 아마 이 시기에 많이 건조해서 어딜 가도 물이 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이 근처에 앉아서 고생한 다리에게 휴식을 주고 있었다. 시원한 물에 발도 담그고, 돗자리를 펴고 앉아 과일을 먹고 있기도 했다. 마치 우리나라 등산길에 볼 수 있는 흔한 풍경들 같아 괜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에겐 돗자리가 없었고, 하필 나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아무 데나 철퍼덕 앉을 수가 없었다. 간만의 등산에 다소 놀란 듯한 무릎을 탕탕 두들겨주며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쳐다았다.


그때,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남자 몇 명이 절벽 위로 올라갔다가 장난스럽게 내려오고 있었다. 어휴, 대체 저기까지 어떻게 올라간 건지. 어딜 가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꼭 하나씩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그 불안한 광경에 우린 금방 그곳을 나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서 왔던 길은 바위산들 위주로 볼 수 있었다면, Kayenta trail로 하산하는 길에서는 협곡 사이로 흐르는 구불구불한 버진 강의 물길도 함께 볼 수 있어 더욱 아름다웠다. 이언캐년을 걷는 일은 마치 수채화로 가득 채워놓은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기 일과도 같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길의 풍경은 그 섬세한 붓터치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야생의 멋을 가진 큼직한 선인장도 우리의 하산 길을 반겨주었다.

커버사진/ 자이언캐년 트래킹의 하이라이트, Kayenta trail

이런 풍경을 대충 훑어만 보고 돌아설 뻔했다니. 브라이스 캐년을 포기하길 정말 잘했다며, 우리는 최고의 여행 콤비라며 걷는 내내 입이 아프도록 자화자찬을 했다. 물론,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쉬움에 좀 더 과장한 것이다. 하지만 자이언캐년 트래킹이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안겨준 것은 확실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그 무엇과도 맞바꾸지 못할 것이다.


물이 분무기처럼 뿌려지던 Lower emerald pool

아쉽지만 The Grotto라는 지점에 다다르며 트래킹을 끝내고, 우린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타오르는 태양 아래 서 있었던 차는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서, 한참 호들갑을 떨며 환기를 시킨 뒤에야 겨우 탈 수 있었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두 번째 묵을 숙소가 있는 ‘카납’이었다.


이때쯤 우리 둘의 얼굴에는 행복함과 피곤함이 동시에 묻어있었다. 즐거워서 계속 노래를 불러댔지만 막상 눈 밑엔 검정테이프를 붙인 야구선수마냥 다크서클이 진하게 자리 잡았다. 남편의 컨디션이 걱정되어 “내가 운전할까?”라고 물었는데, 내 퀭한 얼굴을 보더니 마다하고 본인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 질문을 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이언캐년을 벗어나는 길이 이렇게나 아찔할 줄이야. 구불구불한 산길을 차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바로 옆이 절벽이어서 마치 안전바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무서웠다. 다행히도 남편은 운전을 차분하게 잘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연신 창문 위쪽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오빠, 정말 고마워…. 내가 운전했으면 이미 울고 있었을 거야…. ”


길이 조금 무섭긴 했지만, 운 좋게도 우린 주차장을 나서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자이언캐년을 느낄 수 있었다. 가는 길이 계속해서 자이언캐년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이다. 반달 모양의 다리처럼 생긴 암석을 발견하고 신기해서 차를 세우고 구경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그곳도 “The Great Arch”라는 명소였다고 한다.

아직 이곳에 미련이 많이 남은 빨간 차는 몇 번이고 갑작스러운 갓길 주차를 했다. 우린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잘 달랠 수 있었다.



자이언캐년 트래킹 중 만난 풍경
운전하던 길에서 우연히 만난 "The Great 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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