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는 이유
유튜브 왜 봐요? 책이 이렇게 재밌는데?! 지금 인스타 할 때가 아니야. 재밌는 책 엄청 많아!라고 외치고 싶다.
나도 유튜브 많이 보고 쇼츠는 더 많이 보지만 책이 훨씬 재미있다. 중학교 여학생의 마음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하는 책이 있는데 안 읽고 유튜브와 인스타만 하는 것은 너무 아깝다. 요즘 청소년소설을 읽고 있다. 청소년이 주인공일 뿐이지 성인이 읽어도 충분히 재밌고 공감할 수 있다. 성인이 읽으면 자신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때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었나, 친구관계는 어떠했나, 외로웠었나, 부모님의 어떤 점이 싫었나 같은 것들을 반추할 수 있다. 현재의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우리 집에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가 내가 읽었던 책들을 좀 봤으면 좋겠다. <너를 위한 B컷>, <유진과 유진>,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소희의 방> 등 모두 너무너무 재밌다. '네가 읽으면 공감하면서 나보다 더 재밌게 읽을 것이다'라고 강추강추하는데도 안 읽는다. 어휴... 답답해. 책을 왜 안 읽어? 이 좋은 걸 왜 안 해?
한참을 책 왜 안 읽냐고 하소연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진짜 책 안 읽으면 안 읽는 사람 손해다.
소희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아빠는 죽었고 엄마는 재혼해서 떠났다. 할머니와 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작은 아빠네 집에 얹혀살았다. 눈칫밥 먹고살다가 부자아저씨와 재혼한 엄마와 살러 온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 집에는 엄마가 재혼해서 낳은 남동생 둘이 있다. 소희는 이 집에서도 주눅이 들어있다. 엄마와 관계도 기대했던 보통의 모녀관계가 되기 힘들다. 소희는 새아빠와 엄마의 집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갈등하고 화해하고 성장해 간다.
예전에는 소설 속 설정이 특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기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사람 한 명 한 명, 가정 한 집 한집 들여다보면 다 나름의 사정과 아픔이 있다. 그렇기에 소설 속 인물의 설정이 현실세계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각자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어찌 보면 현실이 더 잔인하다.
소희는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이 맞고 더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가진 것도 많다.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절친도 있고 남친도 있고 새아빠는 부자고 엄마는 젊고 예쁘고 새아빠의 딸인 리나와도 돈독한 관계가 되고 남동생도 둘이나 있다. 아픔과 우월한 점이 섞여 어느 정도 상쇄되어 평범한 사람과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읽는 이유가 뭘까. 나는 오랫동안 소설을 그냥 재미로 읽었다. 요즘은 재미 외에 다른 이유도 발견했다. 소설 속 주인공과 인물들이 특수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읽으며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다. 보통 사람은 보통 사람대로, 소설 속 인물은 소설 속 인물대로, 소희는 소희대로, 그러니까 다 저마다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주변인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다.
특히 <소희의 방>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입체적이다. 단편만 보면 알 수 없는 다른 모습을 거의 모든 인물이 가지고 있다. 실제 우리가 그렇듯이 말이다.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모두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채경과 친구들에게 보이고 싶은 소희와 실제의 소희, 소희에게 넘치는 사랑을 준 할머니였지만 며느리인 소희엄마에게는 표독스러운 시어머니, 소희에게는 엄마지만 시어머니에게는 아들 잡아먹은 년, 부잣집에서 귀부인처럼 살고 있는 줄만 알았던 엄마의 복잡하고 절망스러운 모습,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너그러운 아저씨지만 전 부인과 소희엄마를 때리는 새아빠, 새엄마(소희엄마)한테 못되게 구는 새아빠의 딸 리나, 몇 년 동안 변화하여 소희와 연대하고 자매의 정을 쌓는 리나, 구질구질하게 울면서 소희를 불쌍하게 만들어 싫어했던 고모, 정작 소희가 엄마집을 나와 찾아간 고모네집, 그런 고모에게 받았던 위로와 용기, 싸가지없는 부잣집 아들인 줄만 알았는데 부자도 아니고 싸가지가 없지도 않은 재서, 그런 재서를 좋아하는 소희, 그리고 동시에 지훈과 사귀는 소희의 헷갈리는 마음까지.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된다. 좋든 나쁘든 현실은 그런 거니까. 현실 안 대부분의 것들은 회색지대에 있으니까.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로 읽고, 이런 소설 읽었다고 아는 척할 수 있고, 약간의 정보를 얻는 용도로 읽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나마 소설이 주는 힘이 있다고 느꼈다.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몰랐다. 소설가들이 '소설이 주는 힘은 이런 것이다'라면서 뭐라 뭐라 할 때면 지성인처럼 보이려고 자신조차 잘 모르는 소리로 소설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설가들이야 자기들이 쓰는 거니까 뭔가 그럴듯한 '소설이 주는 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이라고 흘려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소설의 힘과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선명해졌다. 소설 속 인물과 밀도 있는 감정 묘사를 통해 현재 내 감정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내가 매일 대면하는 현실에 살아 움직이는 상대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찾아다녔던 소설을 읽는 이유였다. 독서인생 25년 만에 깨달았다...! 그러니 중학교 2학년 딸아, 핸드폰만 보지 말고 책도 좀 읽어라.
작가의 말 중에서.
내 세대의 여성들은 얌전하고 순종적이고, 욕망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교육받으며 자랐다. 나도 모르게 내면화된 생각이 소희로 표출된 것인지 모르겠다. 소희를 이상적인 아이로 만들어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소희처럼 되기를 은연중에 강요한 것은 아닌지 뒤늦게 돌아보게 되었다. - <소희의 방>, 이금이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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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환경에서도 바르게 잘 자라는 아이의 모습은 어른의 시각으로 그려진 것이다. - <소희의 방>, 이금이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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