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썬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연스레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이 많았지만 30대가 되니 왜인지 대인관계를 만들 일이 참 없다. 가끔은 심심하여 동호회에 나가봐도 공감할 구석이 없어 더 외로워져 모임을 탈퇴한다.
전국 팔도에 친구가 깔려있는 아빠는 그런 나를 이해 못 하고 늘 어디든 나가서 사람을 만나 보라며 들볶지만 사람의 온정은 커피와 빵을 사러 나갈 때 점원을 만나거나 학원 일을 나가는 정도면 충분한 듯하다.
딸 소피는 여름방학을 맞아 아빠 캘럼과 튀르키예 있는 작은 호텔로 떠난다. 소피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빠와 떨어져 살다가 휴가철이면 아빠와 시간을 보낸다. 캘럼은 딸이 11살이 되자 사뭇 거리감을 느낀다. 소피는 막 사춘기가 시작되어 아빠에게 예의상 웃어주기도 하고 자기 기분을 솔직하게 말하는가 하면 감추기도 잘한다. 호텔에 있는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고 오랜만에 만난 아빠는 뒷전이다. 캘럼은 남이 피다 만 담배를 주워 피고 음료수 한 잔 값을 아끼지만 비싼 물건을 차고 남들 시선에 아랑곳 않고 내킬 때마다 태극권을 한다. 소피는 그런 아빠가 창피하지만 익숙한 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여행 마지막 날 소피는 심통 난 아빠의 기분을 풀어주려다 아빠의 빈곤한 주머니 사정을 건들고 만다. 캘럼은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인생이 긴 터널 같기만 한데 이제 사랑하는 딸에게마저 손가락질당한 것이다.
소피는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고 아빠와 보낸 마지막 여행을 회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요즘 아빠는 엄마 잔소리를 피해 눈치껏 집안일을 해 둔다. 삼식이를 면하기 위해 아침은 사과로 때우고 점심은 목욕탕 메이트와 먹고 저녁은 엄마의 밥상을 받는다. 친구와 약속이 없으면 마트에서 주전부리나 쓸데없는 생활용품을 산 다음 엄마 몰래 안방 화장실에 물건을 숨겨 둔다. 어린 시절의 아빠는 사업 스트레스로 자주 욱하고 물건을 부시고 욕을 많이 하셨다. 가족들은 곧잘 아빠의 감정 쓰레기통이 됐다. 난 20대가 되어 아빠를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하고 엄마가 같이 물건을 던지며 아빠에게 반격하자 아빠의 횡포가 사그라들었다. 가족 안에서 입지가 점점 위태로워지니 눈치 빠른 아빠가 태세전환을 시작한 탓도 있을 것이다. 이따금씩 자식들이 모두 자기를 떠나고 외롭게 늙을까 봐 드문드문 한숨을 쉬며 걱정하는 걸 보면 내 추측이 맞는 거 같다.
어린 시절 아빠에게 사랑을 느낀 순간이 있긴 있었다. 아빠와 나는 언니 유치원 행사에 갔다. 저녁 늦게까지 행사가 이어졌는데 추운 데 오래 있었던 내가 화장실에서 볼일 본다는 게 급해서 바지에 쉬를 해 버렸다. 아빠가 말없이 내 젖은 바지를 검은 봉지에 넣고 양복 마이를 벗어 내 몸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내 오줌싸개 모습을 사진을 찍어 남겨주셨다. 나에게 말도 안 걸고 이뻐해 주지도 않은 이 키 작은 아저씨가 나를 보고 씽긋 웃어줬다. 초여름밤은 엄청 추웠는데 아빠가 덮어준 양복 안은 엄청 따뜻했다. 긴 테이블 위로 아빠들이 팔씨름을 하며 힘겨루기를 했다. 매번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는 아빠가 그날은 언니가 행사를 즐기고 있는 동안 내 옆에 꼭 붙어 나를 챙겨주었다.
아빠는 여전히 본인 기분이 무엇보다 우선인 분이시지만 내가 본가에 오면 꼭 내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신다. 어마어마한 잔소리와 함께.
그렇게 잔소리를 한참 듣다가 화제를 돌리려고 살고 있는 건물 아래 커피집이 이제 없어진다고 말하니 아빠가 갑자기 너 이제 그 좋아하는 커피 어디 가서 사 먹냐며 어떡하냐는 말을 반복했다. 커피집이야 많고 많은 게 커피집인데 그게 왜 걱정이 되나 싶었다. 혼잣말로 그 집 커피가 유독 맛있다고 한 걸 기억하셨던 걸까.
그렇게 아빠가 애정하는 딸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가 삶을 꾸려가는데 큰 의지가 된다.
캘럼은 여행 중 수중에 가진 돈을 털어 딸에게 비싼 카펫을 선물한다. 어른 소피의 침대 아래에 아빠의 카펫이 깔려 있다. 소피의 고요한 눈은 이따금씩 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