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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Feb 22. 2021

요즘의 나를 채우는 것들

기록하고 머무르며, 산책하는 나날

01

오랜만에 '글'이란 걸 쓰려다가 문득 이 단어가 내게 맞지 않는 옷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라는 단어는 노트북 앞에 앉은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나를 비장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의미와 가치라는 족쇄에 묶여 그 어떤 내용도 쉽사리 써지지 않는다. 새하얀 공간 위에 깜빡거리는 커서만을 바라보다가, 결국 단어를 '기록'으로 고쳐 썼다. 비로소 이야기의 방점이 읽는 이가 아닌, 쓰는 나 자신에게로 넘어온 느낌이 든다. 서서히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문장의 호흡도 한결 자연스러워진다. 인식의 프레임은 이토록 무섭다. 어디 가서 글 쓴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아야지.



02

이사를 앞두고 있다. 지금의 집보다 가로로 더 넓어진 집을 얻길 원했는데, 서울의 집값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상승 중이었다. 오래도록 발품을 팔았지만, 결국 세로로 조금 길어진 방과 완벽한 숲세권이 특징인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새로운 집에서의 생활을 잠시 상상하던 중, 2년을 함께한 지금의 공간을 둘러보았다. 좁디좁아 고개를 완전히 돌릴 필요 없이 집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원룸. 빨래 돌아가는 소리가 음악 소리와 함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쏟아지는 정남향의 햇살이 하얀 공간을 노랗게 물들인다. 부족하면서도 한편으론 넉넉하고 따뜻한 이 풍경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도 비슷하게나마 마주하게 되길.



03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발목을 드러낸 채 좋아하는 로퍼를 신고 선선한 밤을 걷는 계절. 최근에 <시와 산책>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읽는 내내 가장 좋아하는 서울의 길을 걷는 상상을 했다. 어느 저녁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해 새문안교회 앞을 지나, 차분함을 머금은 경희궁 골목길을 걷는다. 골목의 중간 지점을 돌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카페 '커피스트'. 잠시 그곳에 들려 비엔나커피 한 잔을 마신 뒤, 돌아가는 길에는 교보문고에 들려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골라본다. 리스본의 밤 거리를 사랑했던 페소아처럼,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수없이 많은 위로를 받아왔다.


여름날 긴긴 저녁 도심의 고요를, 특히 하루의 가장 북적이는 시간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고요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사랑한다. 아르세날 거리와 알판데가 거리가 끝나는 곳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 슬픈 거리들, 조용한 선창가를 따라 이어진 길. 저녁때 그 적적한 거리들을 걷노라면 그것들이 자아내는 슬픔이 나를 위로한다.

페소아, <불안의 책>


다가올 봄에는 계획된 내일이 없어 밤늦도록 걸어도 괜찮은 날이 많았으면.


걷다가 만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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