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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Apr 26. 2020

인생의 악보를 그리는 사람들

고전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스포일러 있음


처음 읽을 땐 좀 혼란스러웠다. 중심인물이 여러 번 바뀌고 선명한 서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세 번 정도 밑줄 친 문장들을 곱씹고 나니 흐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밀란 쿤데라는 우리가 살면서 문득 떠올리는 존재론적 고민을 끝까지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인생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포인트들이 많다. 사실 모든 페이지가 명문장이라 골라내기가 매우 어렵지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좋은 문단을 뽑아보았다.



<존재의 가벼움>

...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사비나는 배신하는 재미로 산다.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녀는 낯선 미지의 세계에 끊임없이 매료되어 자주 일상을 두고 떠난다. 익숙한 것은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짐짝처럼 느껴져서일까.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배신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어머니부터 조국까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배신한 탓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왜 자꾸 배신하고 싶어 하는지, 그 이면의 욕망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한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결국 가벼워지는 것이 인생의 목표일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나도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편이다. 특히 여행. 아무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곳에서 마음껏 거닐며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순간이 온다.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이 세상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면 내 모든 행동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 날이 길어지면 분명 허무해지는 때가 온다. 내 존재가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참을 수가 없다.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짐은 늘 지고 있어야 살 수 있는 것 같다.



<가벼운 우연이 악보가 되기까지>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면서 살아간다. 적정선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무엇이 목표인지조차 모른 채 급급하게 살아가는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인생 2 회차라면 전 인생의 오류를 고쳐나가며 의미를 찾겠지만 이번 생은 처음인데. 게다가 우리가 애써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은 사실 랜덤 그 자체다. 아래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이 그걸 증명한다.


그들 사랑의 역사는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이라기보다는 'Es konnte auch anders sein(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다. 이렇듯 치명적 결정은 칠 년 전 외과 과장에게 좌골 신경통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우연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면 내가 살아가려고 애쓰는 인생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지금 카운터에서 코냑을 들고 토마시에게 다가가는 그녀는 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테레자의 행동으로 어렴풋한 답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단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보니 테레자는 토마시의 모든 것이 자신과 맞아떨어진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우연히 베토벤 음악이 흐르고, 그가 책을 한 권 들고 있고, 어깨에 새가 내려앉는 것까지 어떤 계시라고 생각한다. 테레자는 그 우연에 주목하기로 마음먹는다. 수많은 우연이 우리를 지나치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잡느냐 마느냐는 우리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테레자처럼 우리가 선택한 특정 우연들이 삶의 악보에 새겨져 고유한 음악을 완성한다. 우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반복하고 곱씹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운명이 되는 것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답답할 때가 있었다. 이것도 좀 좋고 저것도 좀 좋은데 깊이 들어가면 또 아닌 것 같고. 괜히 깊이 팠다가 나와 더 잘 맞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놓쳐버리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그때 어디선가 취미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읽었다 (어쩐지 필립 k. 딕이 생각나는 걸 보면 그 작가가 한 말인가?). 취미야말로 순전히 내 자유의지니까 좋아서 계속하다 보면 취미가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니. 하나를 콕 집어 받아들이고 깊이 파다 보면 어느새 그게 내 운명이 되어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를테면 레슬링, 을 나의 운명이라고 여기고 10년, 20년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레슬링을 위해 태어난 여자'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 물론 전문가가 되는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가 관심 가는 분야를 선택하는 게 현명하겠지만. 운명처럼 이건 내 길이야! 하고 지치지 않고 빠져드는 건 없는 것 같다. 일이든 사랑이든.


그래서 나를 믿는 게 중요하다. 난 이걸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이게 내 운명이야, 힘 있게 믿다 보면 세상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분류할 거다. 내게 찾아온 특정 우연을 놓치지 않고 악보에 옮기면 조금씩 원하는 음악을 완성할 수 있겠지.



<이미 악보가 있는 성숙한 인간들의 닿을 수 없는 거리>

삶을 하나의 악보로 보는 관점이 좋았다. 작가는 이 비유를 남녀 간의 사랑에도 대입한다. 이미 윤곽 잡힌 악보를 가지고 있는 성숙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그 간극이 얼마나 아득한지를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에 난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 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터운 사전이 될 것이다.
프란츠는 어둠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꼈다. 이 어둠은 순수하고 총체적이다. 우리들 각자가 내면에 품고 있는 무한성이다.... 그러나 사비나에게 있어서 이런 어둠은 무한성이 아니라 다만 그녀가 보는 것과의 불화, 보이는 것에 대한 부정, 보는 것의 거부만을 의미했다.
뉴욕의 아름다움이 지닌 낯섦에 사비나는 광적으로 매료되었다. 그 낯섦은 프란츠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동시에 그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도 했다. 그것은 그에게 유럽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악보가 새겨져 있다고 해서 새로운 악보를 추가할 수 없지는 않다. 프란츠는 사비나가 떠난 후 그녀가 알게 모르게 그의 악보에 새긴 흔적을 자각하게 된다. 취향 같은 것.

사비나라는 육체의 존재가 그가 믿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중요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


물론 한 때 같은 악보를 공유했던 사람들도 계속해서 발맞춰 가지 않으면 순식간에 불협화음으로 변한다.

예전 동료였던 두 사람 모두, 특히 토마시 쪽에서 아쉬움이 더했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불가능해졌다. 그는 자기를 잊은 동료들을 크게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어색한 표정 짓지 말게. 굳이 날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세상 물정으로 보아 너무도 당연하지! 콤플렉스를 갖지 마! 자네를 만난 게 기뻐!" 그러나 이조차도 그는 말하기가 두려웠다. 이제껏 그가 한 어떤 말이라도 의도된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고, 옛 동료는 진지한 말 뒤에 조롱이 숨어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키치가 된 악보>

이 책에서 키치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어디선가 키치 한 게 대중적인 거라길래 뭔가 트렌디하고 힙한 느낌인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전형, 유형, 카테고라이징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첫눈에 쉽게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미지나 느낌. 그러니 대중문화는 키치와 뗄 수 없다.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나의 고유한 악보는 타인에게 키치로 인식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식하기 편한 형태로 누군가를 구분 짓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서 키치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석에 새겨진 문장으로.

공산당의 사랑을 뿌리치고 죽었던 시인 프란티쉐크 흐루빈이다.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사력을 다해 도망치려 했지만 장관은 그의 관까지 따라왔다. 그는 무덤 앞에서 소련연방공화국에 대한 시인의 사랑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오직 그녀만을 보고자 했다. 그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시선만으로도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의 눈은 마리클로드에게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용서했다....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오랜 방황 끝의 귀환....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저 두 번째 문단의 상황을 프란츠의 상황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그는 아내 마리클로드를 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려 했지만 몸이 굳어 돌릴 수 없었다.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노려보다가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택했다. 물론 첫 번째 문단도 죽은 사람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연설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이 어떤 인생을 추구했든, 결국 마지막 묘지 앞에서  인생의 의미를 결정짓는  타인이다. 착한 사람이었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야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잊히기 전까지는 영원히 그 이미지로 기억된다.



<키치에 얽매이지 않은 니체>

키치는 그래서 인류를 하나로 묶어준다. 함께 웃고 울고 공감하는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감동하다 보면, 결국 인류가 가장 우월한 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 우월감은 많은 것을 당연시하게 한다.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니체가 바로 그런 니체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테레자는 죽을병에 걸린 개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는 테레자다.... 이들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행진을 계속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우리 인생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다. 우연이 쌓여 하나의 키치가 되기까지.  과정을 탐구한 책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은 가볍다. 우리 존재도.




책에서 매력적으로 느꼈던 캐릭터 세 명도 좀 더 자세히 기록해 보고 싶다.


<사비나>

그녀는 정말 성공적이었던 그녀의 첫 번째 그림을 떠올렸다. 실수로 붉은 물감이 흘러내렸던 그림. 그렇다. 그녀의 작품들은 실수의 아름다움 위에 구축된 것이다.

책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사비나다. 감성과 사고의 깊이가 남다르다. 실수가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그녀의 시선은 너무도 특별하다.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 나라의 고통스러운 드라마가 투명하게 드러났기에 그녀는 한결 아름다웠다. 아! 사비나는 이 드라마를 사랑하지 않았다. 감옥, 박해, 금서, 점령, 장갑차 같은 단어는 그녀에게는 모든 낭만적 향기가 빠져 버린 추한 단어들이다.

이 대목을 읽고 한 친구가 생각났다.


예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삶에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이라고. 상대적으로 인생의 여러 면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고찰한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물론 100%는 아니다. 비뚤어진 채 머물러 있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보다 고난을 겪고 성장한 사람이 늘 훨씬 더 매력적이다. 따뜻하고 싹싹한 호감형 인간일수록 부딪히고 깨지다가 스스로 무언가 깨닫고 일어난 경우가 많다. 다양한 각도로 세상을 볼 수 있고 그만큼 배려하고 이해하는 부분도 많아진다. 그 친구 역시 그랬다.


어찌 보면 그들이 진정한 행운아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상이 주는 고통은 그만큼 빛나길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그 어둠의 터널을 다 지나와 성공한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또 다르다. 고통은 될 수 있으면 겪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고통을 겪고 성장한 사람은 아름답지만 정작 그 사람은 그 고통이 낭만적이지 않다.


그래도 절망적일 때마다 '얼마나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라고 중얼거리며 그 시간을 이겨내려 애쓰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녀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처럼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울리는 유일한 단어, 그것은 공동묘지였다.... 저녁나절 공동묘지는 불 켜진 자그마한 초로 가득 차서 죽은 자들이 유치한 무도회를 여는 것만 같다. 그렇다. 유치한 무도회였다. 삶이 잔인했기에 공동묘지에는 항상 평화가 감돌았다.... 그녀는 울적해질 때면 자동차를 타고 프라하를 멀리 벗어나 그녀가 좋아하는 공동묘지를 산책했다. 푸르스름한 언덕배기에 있는 시골 공동묘지는 요람처럼 아름다웠다. 프란츠에게 공동묘지는 뼈다귀와 돌덩어리의 추악한 하치장에 불과했다.


삶이 멈춘 공동묘지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비나. 감히 유치한 무도회라고 생각하는 사비나. 역시 감성의 깊이가 남다르다. 너무 매력적이다.



<테레자의 어머니>

밀란 쿤데라의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너무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고상한 철학이 아니라 지독한 내면과 생각을 파고든다. 테레자의 어머니 캐릭터를 묘사할 때 특히 그렇다. 인간의 가장 못생기고 옹졸한 속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부정하고 싶은 나의 모습.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가질 수 없을 때 차라리 극단적인 반대를 택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자신이 젊어질 수 없으니 상대를 어리고 유치하다고 폄하하거나, 자신이 자신감이 없으니 상대를 나댄다고 폄하하거나... 스스로를 유리한 위치에 놓기 위해 표독스러운 심술을 부리는 마음이 참 날카롭다.


그녀가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 욕실을 잠그는 것은 금지였다. 그 점에 대해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너에겐 수줍어할 권리가 없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모든 육체는 같은 것이며 줄줄이 발을 맞춰 행진하는 형상이었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테레자의 어머니는 몸을 보여주기 부끄러워하는 테레자에게 말한다.

'왜 그래? 네 몸은 특별하지 않아.'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잔인한 말이다. 한 사람의 육체는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을 앞둔 아이에게, 모두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니까 너의 이 순간이 존중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건,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과 분명히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



<테레자>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테레자는 당연히 자존감이 매우 낮다. 스스로의 인생을 살지 못한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거나 토마시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존재한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양. 자기가 가진 통행증이라곤 이 비참한 입장권밖에 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울고 싶어 졌다. 울음을 참기 위해 그녀는 수다를 떨고 큰 소리로 말하고 웃었다.
테레자는 그들보다 많이 읽었고 그들보다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다.


테레자는 똑똑해지고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 같은 두려움에 떤다. 누군가 '여긴 네 자리가 아니야, 돌아가!'하고 외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이 느낌이 뭔지 잘 안다. 내가 원하는 '성공한' 나의 모습을 향해 달려가고, 어떤 때는 즐기며 취해 있다가도 문득 떼어버리고 싶은 초라한 모습이 불쑥 튀어나올 때. 그럴 땐 그냥 지긋지긋하지만 마음은 편한 미성숙한 과거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그녀는 그 부름에 답하여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 욕구도 느꼈다.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늙기를 바라.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나약하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였다.


그럴수록 테레자는 스스로가 아닌 남에게서 자존감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토마시의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 그러나 점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자신이 토마시를 바닥까지 긁고 있음을 느낀다.

만약 그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그녀는 여기서 무엇이 될까? 그녀는 일생 동안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 그녀는 그들의 만남이 처음부터 오류에 근거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날 겨드랑이 끼고 있었던 '안나 카레니나'는 토마시를 속이기 위해 그녀가 사용했던 가짜 신분증이었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하던 중 삼십 초쯤 말을 멈추었던 둡체크 같았고, 말을 더듬고 숨을 돌리고 말을 잇지 못했던 그녀의 조국과 같았다.
하느님 맙소사!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정말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 테레자의 약함은 그가 더 이상 강하지 않아 그녀 품에서 토끼로 변할 때까지 매번 그에게 타협을 강요했던 공격적인 약함이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스스로의 악보를 완성하기 위해 외부의 힘에 죽도록 집착한 끝에, 그녀는 그렇게 기괴한 행복을 덤덤히 느낀다.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허무함이다.



우연으로 시작해 인생의 의미를 완성시키기까지, 기승전결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이 외에도 인생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너무 많다. 형광펜 범벅. 고전을 읽을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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