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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May 04. 2020

지상 최대 건축물 주민들의 이야기 <타워>

드라마화 성공 가능성: 4


*스포일러 있음

국가로 인정받은 거대한 건물 '빈스토크'

정말 특이한 설정이다. 600층이 넘는 높이까지 길고 넓게 뻗어 하나의 국가 지위를 인정받은 건물이 있다. 50만 인구가 살고, 건물에서 나고 자라 한 번도 나가지 않은 토박이들도 많다. 빈스토크의 부동산 가격과 물가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인공위성 등 우주 관련 첨단 서비스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주민들은 익명과 적당한 거리 유지를 좋아하는 도시적 특성을 보인다. 


주변국과 버스로 20분 거리도 채 안되지만 비자 발급이 매우 깐깐하다. 외지인이 빈스토크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층 별로 국경이나 비자 면제 구역 등이 정해져 있고, 국가인만큼 병원이나 쇼핑몰, 공원, 경찰, 정부, 군대 등도 전부 건물 내 특정 층에 있다. 그러니까 자동차를 타고 수평으로 달려 병원에 가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직으로 올라간다 뿐, 다를 것은 별로 없다. 집 담도 위로(층수로) 쌓는다. 


엘리베이터가 유일한 이동수단이므로 여기저기서 갈아타는 매우 복잡한 '엘리베이터 정류장'이 곳곳에 있다. 정기권을 끊어 사용하며 상류층 전용 엘리베이터도 있다. 건물 내 구역에 따라 권력 구조가 나타나는데, 이를 연구하는 기관이 '미세권력연구팀'이다. 독자적인 통화(BW)를 사용하는데, 1BW는 한화 약 5,120원에 해당한다. 웨스트 월드처럼 워낙에 세계관이 꼼꼼하고 낯설기 때문에 파생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다.


책은 빈스토크 거주자들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모았다. 같은 건물에 사는 만큼 조금씩은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 묘미가 산다. 거대하고 화려하지만 어쩐지 삭막한 배경과는 대조적으로, 이야기들 대부분이 아련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가장 드라마적으로 재미있었던 이야기 두 개를 꼽아보고 싶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집단, 두 남녀의 사랑

하나는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이라는 단편으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수직 주의자와 수평 주의자의 사랑이야기다. 우리로 치면 정치적 우파와 좌파 정도? 두 개념은 기계설비가 중요한 수직 운송조합 쪽, 사람의 노동력이 중요한 수평 운송노조 쪽에서 각각 파생되었다. 교통 공무원인 주인공은 소위 수직 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고시생 시절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수평 노조에서 일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중시하는 노동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땡전 한 푼 없던 그 시절 그는 난방도 안 나오는 520층 방 한 칸에 살았다. 옆집 여자가 트는 빵빵한 난방에 기대어 근근이 목숨을 건졌다. 건물 구조 때문에 옆집을 볼 수 없어 7년이 지나도록 궁금해하기만 하다가 어느 날 '520층 연구'라는 책을 집필한 작가가 그녀임을 알게 된다. 강연에 가고 얼굴 도장을 찍으며 서서히 가까워진 둘은 사실 이념 자체에 연연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대각선 주의'라도 만들자며 시시덕 거린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의 직장과 여자가 속한 단체에 둘에 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곧이어 (우연히) 수평 노조 쪽에서 빈스토크에 4차례 폭탄 테러를 가하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긴급대피계획 1호, 즉 50만 명 주민들이 건물을 빠져나가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안 그래도 엘리베이터 폭동으로 난리인데 주변국은 밀려 내려오는 빈스토크 주민들을 보고 선제공격이라 간주하여 군 방어 태세를 갖추고... 전쟁이나 다름없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책은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남자가 서점에서 '217층 연구'라는 책이 나온 것을 발견하는 다소 서정적인 이야기로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충분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스라고 생각한다. 리틀 드러머 걸 같은 스파이 이야기로 파고들거나,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진영이 프로페셔널하게 협동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확대해볼 수도 있다. 혹은 빈스토크 주민이 난민이 되는 이야기에 집중해봐도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가 국제정치학을 전공하여 디테일하게 적어주니 읽을 맛이 난다.



망치러 온 동네와 사랑에 빠져버리다

두 번째는 '샤리아에 부합하는'이라는 단편이다 (참고로 작가가 종교에 관심이 많은지 책에 이슬람교나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수록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주인공은 코스모마피아의 일원이다. 코스모마피아란 구공산당 계통의 무장세력 단체다. 설정 상 빈스토크와 적대관계인 모양이다. 빈스토크는 코스모마피아 주둔 의심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이에 가족을 잃어 적개심을 품은 주인공이 빈스토크에 위장 침투하여 테러하려는 이야기다.


빈스토크 내에는 설립 당시부터 코스모마피아 쪽에서 심어둔 폭탄이 숨겨져 있다. 17개 정도 되는 이 장소들은 일반 가게로 위장해 영업 중이다. 가게 주인들이 65년간 폭탄을 지켜 온 셈이다. 주인공은 상부로부터 지령을 받고 때가 되었음을 일러준다. 일생을 걸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했으나, 작전을 수행할수록 그녀는 생각이 많아진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셰흐리반은 빈스토크가 싫지만은 않았다.... 폭격으로 희생된 동지들을 떠올렸다.... 반드시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때는, 현장이 이렇게 뜨거울 줄은 미처 몰랐다. 심판의 날, 신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메마른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눈부신 광경이었다.


차근차근, 그리고 꼼꼼히 모든 사항을 체크했지만 막상 시간이 되자 폭탄은 단 한 개도 터지지 않는다. 어리둥절한 채 찾아 간 주인공에게 한 가게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60년을 살면서 지켜봐 왔지만, 바벨탑이 아니었거든. 우리끼리 서로 짜거나 한 건 아니었어. 물론 한두 사람은 나처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어. 그래도 하나도 안 터진 건 미안해. 정말로 예상 못 한 일이었어.... 하지만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어. 내 손으로 여기를 없앨 수가 있어야 말이지. 여기 이 동네 말이야. 이 나라 전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이 동네만큼은.... 우리 집에 있는 놈만은 불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여기는 바벨탑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저기.......


동네에 정이 들어버린 가게 주인들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몰래 폭탄을 제거한 것이다. 뭐랄까, 일말의 의심도 없이 증오하고 미워하던 곳의 코어에 들어가 보니 다 사람 사는 곳이더라... 하는 류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하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특히 당사자가 적개심이 높을수록. 작가님이 과하지 않은 포근한 감성이 있으신 것 같다. 드라마에도 이런 담백함이 필요하단 말이지.


표지가 얼마 전에 본 사냥의 시간 같기도 하고(...) 뭔가 낯설고 어두운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메마른 사막에 감성 한 덩이 툭 던지는 느낌이라 좋다. 빈스토크라는 유기적인 배경이 있으니 에픽 서사를 만들기에도 너무 좋다. 이런 식이라면 배명훈 작가님 장편 소설도 얼른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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