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넷째 손가락은 '약지(藥指)'라고 하는데 다른 이름으로 '무명(無名)지' 즉 이름 없는 손가락이다. 손가락을 순 우리말로 이야기하면 엄지, 집게, 가운데 손가락 그리고 새끼 손가락이다. 순번으로 말하는 이름말고 넷째 손가락은 이름이 없다. 그런 손가락이 나에게 존재감이 훅 다가왔다. 어제 왼손 넷째 손가락 손톱 끝부분에 무언가 삐져 나와서 잡아 뜯었더니 약간의 피와 더불어 진물이 나왔다. 아팠다. 그 후로 넷째 손가락이 계속 신경쓰였다.
'나'를 구성하는 신체에 넷째 손가락도 한 부분이다. 평소에는 존재를 잊고 지내다가 이처럼 아프면 생소하게 다가온다. 그 생소함이 그 부분이 존재함을 알려주며 그제야 조용히 있었음에 고마움도 느낀다. 한편으로는 암덩어리도 나의 일부분이다. 암덩어리는 떼어버려야 내가 산다. 나의 일부분이지만 떼어내고 싶은 '나'이다. 철저히 타자화를 시켜야 하는 부분이다. 내 안의 타자를 보기 위해서는 현미경으로 보듯 미세하게 살펴야 한다. 맨 눈으로 보이지 않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사소하지 않고 소중해 보인다.
누구에게나 몸속의 타자가 있다. 환자는 그 타자가 먼저 눈을 뜨고 깨어난 사람이다. 먼저 깨어난 그 눈으로 생 속의 더 많고 깊은 것을 보고 읽고 기록하는 것
- 그것이 환자의 주체성이다.(p.100)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죽음이 멀리 있어 생각하지 않거나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 김진영은 암투병 중이었고 날마다 쇠잔해가는 자신의 몸때문에 자신의 마지막이 머지 않음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여정을 되돌아 본다. 나의 불편함, 괴로움, 찌질함이 보인다. 조금 시야를 넓게 보면 옆에서 격려해주고 보살펴주는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여정이 나홀로 이룩한 여정이 아니라 주변인의 도움으로 이루어짐을 깨닫는다.
돌아보면 살아오는 내내 나는 겁쟁이였다. 불편함, 괴로움, 고통들 앞에서 늘 도피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건 모두가 착하고 친절했던 주변의 타자들 덕이었다.(p.120)
돌아보면 살아온 일들이 꿈만 같아서 모두가 고맙다. 나는 평생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지 나 자신의 능력와 수고로 살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안다.(p.178)
나는 그동안 받기만 했다고,
받은 것들을 쌓아놓기만 했다고,
쌓인 것들이 너무 많다고,
그것들이 모두 다시 주어지고 갚아져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살아야겠다고......(p.94)
타자 속의 나를 살피자 나의 죽음이 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주변의 타자들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의 서사에 다른 사람들의 자리가 있듯이 나의 죽음이 타자에게 끼치는 영향도 상당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