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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책담 Jul 06. 2023

사과(謝過)

안톤 체호프의 <어느 관리의 죽음>을 오마주

 일호는 긴 경적소리에 눈이 떠졌다. 거리를 내다보니 빨간 차가 길게 경적을 울렸다. 앞 하얀 아반테에서 할머니가 내리려 했고 빨간 차는 그새를 못 참고 또 경적을 울렸다.

 “저런, 쫌생이. 그걸 못 참고 지랄한다.”
  할머니가 내리고 하얀 아반테는 옆으로 비켜주었다. 빨간 차는 갑자기 속력을 내더니 보란 듯이 빨리 지나쳤다. 일호는 빨간 차의 경박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그녀와 세 번째 만나는 날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저 경박함에 다치고 싶지 않았다. 직장동료가 소개시켜준 그녀는 첫 만남부터 설레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호는 일호는 평소 툭툭 튀어나오는 욕을 의식적으로 자제하고 있었다. 이 만남이 더 지속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 모습을 조금 감춰두는 것이 필요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의례적이나 세 번째 만남은 서로 호감이 있다는 신호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만남은 지속할 지 그만둬야 할 지 결정할 수 있는 분기점일 것이다.

 일호와 그녀는 오늘 뮤지컬을 보기로 했었다. 일호는 약속시간 15분전에 극장 앞에 왔다. 5분 뒤 그녀는 파스텔톤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일호는 그녀를 보자, 이 여자를 정말 놓치기 싫었다. 그녀가 자주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일호는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느꼈다. 지난 번에 보고 싶다는 뮤지컬이었고 이 뮤지컬 다음에는 TV에 나왔던 파스타 맛집을 예약을 해두었다.
  VIP석이 15만원이나 되어 좀 부담이 되었지만 지금은 아깝지 않았다. 유명한 뮤지컬이어서 VIP석도 거의 많이 찼다. 그녀는 이번 회차에 나오는 배우가 보고 싶었던 배우였다며 너무 좋아했다. 일호는 뮤지컬을 잘 몰랐으나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 자체가 좋았다. 뮤지컬은 한 시간이 넘겼을 때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일호는 그리 재미없었다. 차라리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다. 일어서서 뒤를 돌아보는데 뒷줄 바로 옆에 기획2팀의 김대리가 있었다. 김대리는 일호를 이미 발견했었는지 먼저 미소를 지었다. 일호도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지만 속으로는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유쾌하지 않았다.

 일호가 화장실에 갔다 오자마자 뮤지컬이 다시 시작되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뒤에서 재채기 소리가 나더니 일호의 얼굴과 머리에 침이 튀었다.
  “에이! 씨팔!”
  일호는 순간 욕이 튀어나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호는 김대리가 손수건으로 입을 훔치는 모습을 보았다. 일호가 소리쳤다. 

“야, 새끼야 손수건을 재채기할 때 써야지!”
  사람들이 일제히 일호를 향해 보았다. 일호는 순간 ‘아차’ 싶었다. 옆을 돌아보니 그녀의 얼굴은 굳어졌고 일호를 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일호는 일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뮤지컬이 끝나자 자리에 일어서며 일호는 그녀에게 저녁 식사하러 가자고 했는데 그녀는 묵묵히 일어서 나가길 기다렸다. 그녀는 극장 정문에 가자 오늘은 피곤하다며 저녁은 다음에 하자고 했다. 일호는 다음 저녁은 없을 것을 알았다. 일단 전철역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것조차 사양했다. 그녀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일호의 속은 김대리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찼다. 일호의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김대리가 일호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재채기를 해서 많이 튀겼죠?”
  얼떨결에 사과를 받은 일호는 “어, 그래”라고 대답했다. 김대리는 목례를 하더니 그의 일행과 합류하여 극장을 빠져 나갔다. 일호는 김대리에게 제대로 사과를 받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 한마디로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에 보상이 될 수 없지 않겠는가. 김대리는 벌써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참고 내일 회사에서 다시 정중하게 사과를 받아야겠어.”라고 하며 일호도 집에 돌아갔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했다. 일호는 이 문제로 김대리에게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였다. 말을 하자니 구차하고 하지 말자니 억울했다. 일단 넌지시 비쳐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몇 분전 기획2팀에 갔다. 마침 김대리는 동료에게 어제 본 뮤지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김대리, 나와서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양과장님. 어쩐 일로.”
  일호는 김대리를 데리고 복도 끝에 갔다. 
  “혹시 나에게 할 말이 없나?”
  “제가요? 음. 글쎄요.”
  일호는 김대리의 모른 척에 더 부아가 치밀었다.
  “정말 없나? 이 사람아. 어제 자네가 재채기를 해서 나에게 침 한 바가지를 퍼부어놓고 할 말이 없나?”
  김대리는 갑자기 웃으면서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절까지 했다.

“과장님, 제가 어제는 무척 죄송했습니다. 일행이 있어서 제대로 사과를 못했지요. 과장님 진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는 돌아서서 자기 팀으로 갔다.

 일호는 이번에도 사과를 받았지만 자기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와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김대리에게 우롱당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또 이야기하자니 너무 구차해 그냥 넘기기로 했다. 일호는 책상에 앉아 업무를 봐야 하는데 머리 속은 김대리에 대한 분이 점점 차올랐다. 일호는 김대리가 가해자임에도 피해를 보는 것은 없고 자신만 억울하게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팀장이 와서 지금 어디에 정신줄을 놓고 다니길래 멍하니 있냐고 한소리 들었다. 이렇게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다시 기획2팀에 갔다. 

 “김대리! 잠깐.” 

 김대리는 나를 보더니 얼굴을 확 찌푸리며 나왔다.
  “양과장님, 무슨 일로”
  “아까 사과를 모두 한 것인가? 나는 어제 자네 때문에 소개팅으로 만난 분과 헤어지게 생겼네.”

 “아이고, 과장님 그래요? 어쩌죠. 저 때문에. 제가 커피 한잔을 사겠습니다. 내려가시죠.”
  김대리는 나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타더니 1층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서 나에게 주었다. 
  “과장님. 커피 드시고 화 푸세요. 더 좋은 분 만나시면 되지요.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갔다. 일호는 김대리 뒷모습만 바라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호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 2캔을 사가지고 갔다. 김대리에게 사과를 받고 커피도 얻어먹었지만 개운하지 않은 마음은 남았다. 일호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김대리에게 당한 것이 확실했다. 일호 자신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김대리는 일호의 말을 끊고 사과를 하자마자 돌아섰기 때문에 일호는 제대로 사과를 받은 느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일호는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김대리에게 갔다. 김대리는 일호를 보자마자 인상이 험해지면서 일호에게 다가갔다. 김대리는 일호에게 계단으로 가자고 했다. 계단 출입문을 닫자마자 김대리는 묵직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양과장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네가 재채기를 해서 내가 침 세례를 받지 않았나? 그리고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어! 이것을 말로 끝낼 생각이었나?”

 “무슨 억지입니까? 그게 왜 제 잘못이었나요?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과장님이 저에게 사과해야 되지 않습니까? 뮤지컬 극장에서 저에게 욕지거리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공개망신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선배라고 선배대접을 해주었더니, 뭐 이런 경우가 있어요? 이젠 저도 못 참겠습니다. 사과는 개뿔. 다시는 찾아오지도 마세요!”

 김대리는 말을 쏘아붙이고 나서 계단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일호는 계단에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고, 오히려 김대리는 방귀뀐 놈이 성질 내는 격이었다. 일호는 자기 책상에 돌아왔지만, 분을 삭일 수 없었다. 일호의 얼굴이 시뻘개져서 옆 사람이 보기만해도 분노에 휩싸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호는 퇴근 전에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하기 몇 분전 다시 기획2팀에 갔다. 김대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 일호를 발견하지 못했다. 일호는 천천히 묵직하게 김대리에게 다가갔다. 그때 김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김대리는 다가오는 일호를 보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침 뱉어! 새끼야! 꺼져, 새끼야!”

 일호는 그대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일호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은 일호의 가슴에 모두 박혔다. 일호는 돌아설 수 없어 그냥 주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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