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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mandroom Aug 09. 2022

토마토가 결정하는 세계

<물욕 없는 세계>의 스가쓰케 마사노부는 ‘갖고 싶은 것이 없어지면 세계가 변한다’고 썼다. 이 표현을 빌자면, 먹고 싶은 것이 없어지면 애초에 살림이 존재할 수 없다. 살림의 축은 주방이자 요리이고, 어떤 식재료를 사는 지가 살림의 세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살림의 세계는 토마토가 결정한다.
지난 12개월간 약 25킬로그램 정도의 토마토를 먹었다. 그중 20킬로그램 정도는 쓱배송과 새벽배송으로, 나머지는 스마트스토어 같은 직거래 플랫폼을 통해 샀다. 여기에 임윤찬 콘서트 티켓예매만큼이나 어려운 마켓레이지헤븐의 주문에 성공한 누나가 보내준 토마토까지 더하면 우리가 먹은 토마토는 30킬로그램을 훌쩍 넘길 듯하다. 한 달에 2킬로그램 이상의 토마토를 먹었고 3만 원 정도의 돈을 꾸준히 토마토를 사는 데 썼다. 그러니까 토마토를 계속 사는 동안 내 살림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토마토는 논란의 채소다. 채소로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이 문제는 백 년 전 법정까지 갔었다. 189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이 다룬 관세 사건으로 닉스 헤든 케이스로 불린다. 토마토를 수입해서 팔려던 과일 수입업자 닉스가 채소에 부과하는 관세 10%를 토마토에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관세청 공무원 헤든을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다. 식물의 꽃이 씨앗을 품은 열매로 자라면 과일이라고 설명한 사전을 들이밀었지만 정작 판사는 토마토가 디저트가 아닌 메인 요리에 나오는 식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채소라고 판결했다. 이후 지금까지 토마토는 채소로 불린다.
하지만 토마토는 여전히 과일의 자리를 노리고 있고 증거는 넘친다. 파리바게뜨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방울토마토라던가 보통의 찰토마토 당도 측정값이 5브릭스인데 10브릭스를 넘기는 젤리 토마토, 애플 토마토, 허니 토마토같은 것들(달달이 토마토는 애교 수준이었다). 얼마 전 방송한 TV프로그램 <생로병사의 비밀> ‘달콤한 유혹, 과일의 배신’편에서는 과일을 잔뜩 모아 놓고 찍은 영상 속에 조용히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토마토가 목격되기도 했다. 그것은 토마토의 배신이었다.


내가 토마토를 먹는 관점도 어디까지나 채소다. 후식이나 접대용으로 토마토를 내는 경우는 없다. 설사 나폴레옹 과자점에서 토마토를 토핑한 생크림케이크를 판다고 해도 디저트로 인정할 수 없다는 쪽이다. 대신 토마토를 맛있게 먹기 위해 모짜렐라와 부라타 치즈를 매번 장바구니에 담고 해마다 5월이면 바질 모종을 9주씩 사서 가을까지 키운다. 일주일에 세 번은 토마토소스 베이스의 파스타를 만들고 토마토에 더 잘 어울리는 오일을 찾아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의 세계에도 기웃거린다.
그럼에도 냉장고에 토마토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리집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토마토 된장국 때문이다. 처음 끓인 것은 여러 해 전, 여름이 막 가시고 밤바람이 한 번씩 차다 싶을 무렵의 초가을이다. 여러 날 길게 이어진 마감으로 한밤이 돼서야 퇴근한 아내는 저녁을 거른 채였다. 밥 생각은 없다고 해서 급하게 냉장고에 있던 토마토를 넣고 가볍게 마시듯 먹을 만한 된장국을 끓였다. 배경음 없이 식탁 앞에 앉은 아내가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단출한 국을 다 뜰 때까지 서로 말이 없었다. 토마토 된장국이 내가 전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토마토는 내게 살림의 세계가 됐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재래식 된장이 아닌 시판용 된장이나 미소 된장을 싱겁겠다 싶은 정도로 물에 풀고 한입 크기로 뭉텅뭉텅 썬 토마토와 얇게 채 낸 양파를 넣은 다음 끓이면 끝이다. 멸치나 다시마 육수를 낼 필요도 없고 마늘은 넣어도 되지만 넣지 않아도 괜찮다. 간은 소금과 간장으로 한다. 방울토마토를 넣었다면 한소끔 끓인 다음 토마토의 얇은 껍질이 벗겨질 무렵 불에서 내리고, 찰토마토의 경우는 반대로 뭉근하게 익을 때까지 끓인다. 황톳빛 국물에 붉은 토마토와 하얀 색 양파가 동동 떠 있는 모습은 꽤 단정해서 먹어본 적 없는 사찰의 공양을 떠올린다. 달큰하고 시큼해서 입에 거칠게 남지 않는 맛.


토마토는 이제 사계절 구입할 수 있지만 5월부터 9월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 그러니까 앞으로 제철인 토마토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정도 남은 것이다. 그래서 토마토를 좀 더 부지런히 먹을 생각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하나 만들어 내가 먹은 토마토에 대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당신도 토마토를 먹기 전 사진을 찍어 #traceoftomato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업로드 해주면 반갑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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