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여행 11일차 20240527(월)
* 유럽여행 11일차 20240527(월) 밀라노 - (제노바) - 라팔로-산타 마리게리타 리구레- 포르토피노
* 부제 : 리구리아 해안에 숨은 작은 보석들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 포르토피노!
이른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오늘은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지우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 거실에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포구의 그림 한 점이 걸려있다. 몇 년 전 우연한 인연으로 인사동 갤러리에서 생전 처음으로 구입한 진품으로 '박*덕 화백'의 유화 작품이다. 화백께서 유럽 여행을 모티브로 그린 몇 점의 풍경화 중 하나를 우리 집에 걸게 된 것이다.
작품 속 장소는 유럽의 연예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휴양지, '작은 항구'라는 뜻의 포르토피노(Portofino)이다. 견물생심이라고 그림을 보며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다.
리구리아 해안으로
어제 먹고 남은 스테이크 양파볶음으로 샌드위치 도시락을 만들고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마쳤다. 친절했던 호스트 지오반니에게 앱을 통해 놓고 온 열쇠 위치와 작별 인사의 글을 남기고 출발했다. 길은 금방 밀라노를 벗어나 남쪽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양쪽으로 푸른 목초지 평야가 펼쳐졌다. 이른 아침 달리는 고속도로는 상쾌하기까지 했다. 이틀 동안이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밀라노를 뒤로한 채 또다시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차 안에서 설렘과 두려움의 함께 달렸다. 갑자기 김광석님의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한참을 달리니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점점 험한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에 높은 교량과 터널들을 자주 지나게 된다. 이탈리아의 태백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아펜니노 산맥과 지중해 사이에는 좁고 긴 리구리아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다. 포르토피노는 리구리아 해안선의 중심인 제노바 항구 동편에 반도처럼 돌출된 지형 끝자리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차는 지금 북에서 남으로 아펜니노 산맥을 넘고 있는 것이었다.
콜롬보의 고장, 라팔로
고속도로를 벗어난 차는 금방 라팔로에 접어들었다. 아무래도 포르토피노는 좁은 휴양지여서 숙박비도 비싸고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조금 떨어진 라팔로를 베이스캠프 삼아 포르토피노를 관광하기로 했다. 다행히 차는 라팔로 항구 공용 주차장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초승달 모양을 한 해변을 따라 난 거리로 향했다. 다리 건너 초입에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Cristoforo Colombo'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콜롬보?"
굉장히 익숙한 이름이어서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가 싶어 바로 구글링했다. 그 동상은 바로 미대륙을 발견한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롬보의 기념비였다. 콜롬보가 이탈리아인으로 스페인 왕의 후원을 받아 미대륙을 발견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고향이 이곳 제노바인 것은 미처 몰랐었다.(정확한 출생지역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함)
라팔로는 아름다운 항구였다. 부드러운 해풍을 맞으며 오른쪽으로는 짙푸른 바다와 멀리 떠 있는 하얀 보트들을 바라보며, 왼쪽으로는 파스텔톤의 고풍스런 건물들과 레스토랑, 카페들을 구경하며 야자수와 나무들이 잘 정비된 해안 길을 걸었다. 밀라노와 같은 내륙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다른 독특한 매력이 풍겨나고 있었다.
'산타 마리게리타'를 경유하다
구글맵에 따르면 포르토피노까지 가는 직행버스는 없고 '산타 마리게리타 리구레'라는 곳에서 한 번 갈아 타야 하는 걸로 조회된다. 호텔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기사님에게 포르토피노 가냐고 물으니, 버스비도 안 받고 타라고 한다. 그러더니 몇 정거장 못 가서 내리라고 한다. 저 앞에서 갈아타라고 독특한 영어 발음으로 설명해 주신다. 알고 보니 포르토피노를 오가는 셔틀버스 출발점인 마르게리타 회전교차로에 내려 주신 것이었다.
'산타 마리게리타 리구레'는 작지만 활기찬 아름다운 항구 마을이었다. 어디선가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화창한 햇빛에 더욱 빛을 발하는 파스텔톤의 오래된 건물들과 높은 나무들 사이로 정겹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물어물어 매점처럼 생긴 셔틀버스 부스를 찾아 들어가 One way에 5유로씩이나 하는 티켓을 2장(왕복)구입했다. 티켓 판매원이 오늘 매우 'Crowded(붐비는)' 라고 미리 힌트를 준다. 이내 버스가 도착했다. 근데 이게 웬걸! 버스가 이미 만원이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다 태우지도 못하고 버스는 출발했다.
포르토피노 성당에서의 힐링타임
포르토피노까지 가는 길은 가파른 산을 깎아 만든 구간과 마을을 관통하는 구간을 반복하는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였다. 운행 시간에 쫓기는 건지 버스 기사님은 차 2대가 간신히 교차할 수 있는 위험한 길을 곡예하 듯 내달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국 사람 못지않게 다혈질이고 성미 급하다고 하더니 버스 기사님에게서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종점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얼마 걷지 않아 작은 포구가 나왔다. 드디어 포르토피노에 도착한 것이다. '야~!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 웬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아!' '포구의 풍경만 봤을 때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몰릴 만큼 멋있는 곳은 아닌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둘러보는데 오른편으로 문화유산지에 차량 출입을 금지하는 빨간 동그라미 표지판과 관광지를 가리키는 이정표들의 무게에 힘겨워서 비스듬히 서 있는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화살표 방향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이내 넓어지더니 완만한 비탈길로 이어졌다. 긴 오르막길을 오를수록 왼편으로 아름다운 포구의 풍경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5분 정도 갔을까? 오래지 않아 탁 트인 성당 앞 마당이 등장했다. 성당을 바라보며 왼편으로는 포르토피노의 앙증맞은 포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지중해의 망망대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내가 왔노라!"고 인사를 전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성당 옆 그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아름다운 포구와 바다를 바라보며 아침에 정성스레 싸 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곳에서 여유로움을 넘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오롯이 '나'라는 존재 안에서, 평온한 점심을 즐길 수 있었다. 참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성당 묘지에서의 묵상
점심을 먹고 일어서니 벤치 뒤편 성당 벽에 박혀있는 하얀 돌판들이 눈길을 끌었다. 자세한 내용은 읽을 수 없었지만 묘지석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니 성당 뒤편으로 하얀색 바탕의 묘지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성당 앞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의 공간이었다. 유럽의 장례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호기심을 갖고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자연히 유아 세례를 받고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성당에 묻히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신을 믿던 시절 성당은 그 지역의 중심이었고 공동체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공간이었으리라.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증거 앞에서 죽음을 염두에 둔 삶의 지혜도 배웠으리라. 죽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엄숙한 마음으로 나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하고 그러기에 남은 시간을 감사하며 충일되게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발길을 돌렸다.
포르토피노의 진면목을 보다
성당 옆으로 난 좁고 긴 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산을 깎아 만든 듯한 벽과 계단은 두세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고 가는 동안 좌우 풍경을 볼 수가 없어 터널을 지나는 듯했다. 연이은 계단에 숨이 가빠 올 때쯤 한 아저씨가 한 팔로 가로막았다. 5유로를 내라는 것이었다. 부스도 없이 덩그러니 노상에 책상 하나 놓고 요금을 받고 있어 좀 의아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입장료 다 생각하고 값을 치르고 올라갔다. 길은 탁 트인 전망과 함께 브라운 성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브라운 산성은 그 자체로는 그리 높지 않지만 인근 지역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위치와 성곽 모퉁이마다 돌출된 형태로 보아 군사용으로 지어진 것 같았다. 입구는 한 사람만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계단 통로로 동굴을 지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방어를 위한 설계인 것 같다. 계단을 올라서니 널찍한 복도 좌우로 큼직한 방들이 있다. 안에는 전시물이 있거나 깨끗하게 비어 있기도 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 스텝에는 아치 모양의 세 폭 자리 큰 창이 있었다. 창은 커튼처럼 내려진 외벽의 푸른 넝쿨과 함께 건물 안팎의 명암 차이로 너무도 근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성 밖으로 난 창문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운 뷰를 자랑하고 있었다. 좌측 방에서는 아까 지나온 성당과 묘지 그리고 그 너머로 지중해가 내려다보였다. 우측 방의 창문으로는 멀리 바다 건너 라팔로와 이어지는 해안선의 산들이 뿌연하게 보였고 그사이 넓은 공간의 바다를 크고 작은 하얀 보트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 얼마나 황홀하고 시원한 뷰인가!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견고한 성 위의 절반은 근사한 저택이었고 나머지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포구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넓은 테라스 같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2층의 넓은 통로 끝의 문을 나서니 넓은 테라스로 연결되었다. 탁 트인 산성 테라스의 풍경은 오늘 하루의 피로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오후 햇살에 반사되는 포르토피노 포구의 바닷물과 해안을 따라 동그랗게 서 있는 집들의 빛깔은 오전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집들은 눈 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고 물빛은 영롱한 청록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 이것이 포르토피노의 진면목이로구나!"
리구리아 해안의 숨겨진 보물, 포르토피노 숨은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포르토피노의 진짜 얼굴에 반해 포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멀리 어디선가 목가적인 천상의 목소리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Con te partirò(Time to Say Goodbye)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햐~! 이보다 더 멋진 조합이 있을까?' 기가 막힌 감성이 아닐 수 없었다. 그곳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더 찍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3층에 있는 포구의 역사박물관도 둘러보고 산성을 빠져나왔다.
그림속 프레임을 마주하다
내려가는 길은 산성에서 포구로 바로 이어지는 숲길을 택했다. 이국적인 나무들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산책하듯 내려오니 요트와 여객선이 드나드는 선착장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정박한 하얀 요트들이 돛은 접은 채 긴 창 같은 돛대를 하늘 높이 세운 채 한가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국적이고 산뜻한 그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아~ 바로 여기로구나!'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는 그림과 동일한 앵글과 프레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란히 늘어선 아름다운 집들과 멀리 흐릿한 해안의 산들, 그늘과 햇살의 명암에 따라 빛깔을 달리지는 물결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하얀 요트들까지 거의 똑같은 광경에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의 눈으로 화백께서 포르토피노에서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구도의 스팟이 아니었을까? 걸음을 멈추고 화백께서 느꼈을 영감들을 따라 짐작해 보았다. 순간 내가 화가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그 풍경이 주는 감응에 한참을 빠져 있었다. 이로써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되었다.
리구리아 해안의 작은 보석들
선착장에 큰 여객선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줄줄이 내린다. 순간 '라팔로로 가는 배도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시간표를 훑어보니 마리게리타와 라팔로로 가는 배가 있는 것이 아닌가! 구글맵에는 나오지 않는 여객선 루트가 있었던 것이다. 한 장 남은 셔틀버스 티켓이 아깝긴 했지만, 라팔로 돌아가는 길은 유람선을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유람선 2층 벤치에 피곤한 몸을 의지하여 하루 종일 고생한 다리를 쉬게 했다. 배는 미련 없이 아름다운 포르토피노 항구를 벗어났다. 나는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해야만 했다.
멀리 해안선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위로 하얗고 노란 파스텔톤의 크고 작은 집들이 짙푸른 산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거친 산을 깎아 길을 내고 집을 지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열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늦은 오후 바다에서 조망하는 마리게리타의 모습은 너무도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다.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라팔로는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인지하지 못했던 항구들이었다. 오늘 그 이름을 불려보고 걸어보고 바라보므로 해서 그 항구들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팔로, 마리게리타 그리고 포르토피노, 리구리아 해안의 작은 보석들이여!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