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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Mar 04. 2024

지구본을 들여다보는 마음

'지리 바보'의 너무 늦은 호기심


요즘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지구본을 돌리며 요리조리 들여다보는 일이다. 싱가포르와 발리를 각각 두 번씩 다녀왔는데도 어디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인지 헷갈리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행기에  후 잠들었다 깨어났을 뿐인데 낯선 땅에 도착했으니 내가 알 도리가 있나(?).


사실 나는 방향치에 길치, 한 마디로 '지리 바보'다. 공간 감각이 아예 없다고 해야 하나. 열 번 이상 간 길도 외우지 못해 늘 지도앱을 켠다(내 위치를 잡지 못해서 선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일쑤다). 식당에서 사람들과 밥을 먹다가 잠깐 화장실을 갈 때는 반드시 스마트폰을 들고 가는데 다시 못 돌아올까 봐 그렇다. 실제로 식당 외부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못 찾아서 이십 분 넘게 울먹거리며 식당을 찾아 헤맨 적도 있다.


방금 온 길도 모르는데, 나라 단위로 가면 더욱 혼란스럽다. 부끄럽지만 영국이 유럽 대륙 어딘가에 있겠거니 했지, 섬이라는 것도 비교적 최근에 알았다. 러시아가 큰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것은 처음 알았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친구가 '히말라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히말라야는 어디에 있는 나라야?"라고 물었다가 경멸의 눈초리를 받은 적도 있다. 아직 말할 게 많겠지만 나의 이미지를 위해 여기까지 하겠다(이미지는 이미 끝난 것 같다).


변명을 하자, 나는 학창 시절에 세계지리를 배우지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사회 과목에서 세계사, 세계지리, 사회문화 중에 두 개를 골라야 했는데 세계지리를 선택하지 않았고 영영 그것을 접할 기회를 잃었다. 대학에 가서도 나의 주 활동 범위는 서울 사대문 안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은 물론, 다른 나라까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에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등을 공부했지만 정보 채우기에 급급했지, 큰 그림으로 연결해 볼 생각을 하못했다. 그러니까 지식의 단편적인 부스러기만 모았을 뿐 흐름과 맥락은 전혀 내 머릿속에 저장돼있지 않았다.


다른 나라 지도가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혼자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삼십 대 초반, 나 홀로 처음으로 갔던 해외 여행지가 스페인이었다. 그때 PC에 구글맵을 띄워스페인 주요 도시와 포르투갈 리스본과 포르투, 프랑스 파리의 위치를 보면서 여행 동선을 짰다. 혼자 여행인 만큼 긴장이 되었고 철저하게 계획해야 했으므로 지도는 머릿속에 자동으로 입력이 됐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내가 갈 곳만. '스페인 근처에 포르투갈과 프랑스가 있다'. 나의 지도는 거기서 한동안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그 주변 유럽국가 위치는 관심도 없었다.


남편은 나와 반대다. 자동차 운전을 좋아해서인지 평소에도 길 찾기에 관심이 많다. 혼자서 스마트폰을 요리조리 움직여가며 들여다보고 있길래 "뭘 그렇게 봐?"하고 물으니, "지도"라고 답했다. 그냥 심심해서 지도를 본단다. 각 지역마다 유명한 곳이 어디이고 고속도로는 어떻게 연결돼 있고 어디로 가야 빠른지 등의 정보들을 포털사이트가 아닌 지도를 클릭해 훑어가며 본다. 심지어 고속버스에 앉아있을 때에도 내비게이션앱을 켜서 계속 지켜보고 있다. 지금 시속 몇인지, 내가 도로의 어디쯤인지 궁금하다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정말이지,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외계인 남편은 세계사와 지리에도 밝다. 그래서 내가 어처구니없고 무식한 질문을 할 때도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알래스카는 미국인데 왜 땅이 떨어져 있어?", "영국은 나라가 여러 개야?", "인도랑 인도네시아의 차이가 뭐야?"같은 질문들. 그러면 그는 그에 대한 정보에 더하여 각 나라의 역사나 전쟁사, 발달된 산업 등을 역사 선생님처럼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그럼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구글맵을 열어서 지리를 살펴보기도 했는데 지도를 봐서는 공간감각느껴지지 않았다. 지구는 입체인데 지도는 평면적이다. 그래서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지구본이라는 물건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그것도 두 팔로 겨우 껴안을 만큼 커다란 아이로. 그렇게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지구본을 통해 세계를 한눈에 살펴보게 되었다. 두 번이나 갔던 하와이의 위치를 이제야 알았고, 생각보다 너무 아래쪽에 있는 싱가포르를 보고 깜짝 놀란다. 나는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구본을 돌려본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던 각 나라에 대한 지식을 지구본을 보면서 거미줄처럼 연결한다. 왜 이 나라가 부강해졌는지, 이 나라가 침략을 자주 받는지 알게 됐다. 지구본을 들여다보는 일은 재밌다.


커다란 지구본인데도 대한민국은 엄지손가락보다도 작다. 그 안에 개미보다 더 작은 존재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너무나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존재. 적도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행운의 위치, 거기에 내가 살고 있다. 너무나 운이 좋은 대단한 존재.


스마트폰 달력앱이 있지만 탁상용 월간 캘린더를 꼭 세워둔다. 컴퓨터 모니터에 디지털시계가 표시되지만 시침과 분침이 돌아가는 시계를 벽에 달아놓았다.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가 직관적으로 궁금하다. 지구의 어디쯤을 밟고 있는지, 시간의 어느쯤에 와있는지. 그것을 확인했을 때 나의 실존을 느끼고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할까. 쪼그라들고 급급했던 마음이 너르게 펼쳐지는 기분도 든다. 외계인이 지도앱을 자꾸 들여다보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 지구본을 하나 더 주문했다. 초등학생 조카들이 살고 있는 동생네 집으로. 그 아이들이 나처럼 너무 늦게 세상이 넓다는 것을 깨닫지 않도록. 너희들이 앞으로 살 곳은 좁은 상암동 땅이 아니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커다란 지구라고, 알려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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