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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에서 발견한 실존적 선택

by 글밥 김선영

태어나 보니 땅이 아닌 바다 위에 있었다. 엄마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빠는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00(데니 부드먼)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피아니스트. 그는 말 그대로 ‘전설’로 남았다. 그가 인정하는 유일한 친구였던 트럼펫 연주자 맥스의 입을 통해 바라본 한 사람의 서사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만큼 커다란 두려움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평생을 육지 한 번 밟아보지 않고 배 안에서만 지낸 그는 무자비하게 흔들리는 배에서도 흔들림 없이 걷고 평온하게 피아노를 연주한다. 우리가 땅 위에서 살면서 작용하는 물리 법칙이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내가 평생을 육지 위에서 보내면서 학습하고 적응한 모든 것이 그에게는 바다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기이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반이 아닌 육지에서의 무한한 삶을 알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것은, 말 그대로 ‘육지인’의 입장이고 시선이다. 평생을 지구에서 살았던 나에게 갑자기 화성에 가서 살라고 하는 것처럼 두렵고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손이 네 개 달린 것같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고아에 배 안에서도 가장 저급한 선실을 쓰는 그였지만, 그의 천재성은 단숨에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부유층, 빈민층 구별 없이 그의 연주를 즐겨 찾았고 찬사 했으며 그는 그 안에서 행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랬던 그에게도 어느 날, ‘사랑’이란 것이 닥쳤다. 처음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낼 만큼 강렬한 이끌림이었다. 육지로 내려가는 사다리 계단은 스무 걸음도 안 되어 보였다. 그 위에 서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모자만을 던져두고(이마저도 육지가 아닌 수면 위로 떨어졌다) 다시 그에게 익숙한 땅(선박)으로 돌아간다. 오래된 배가 곧 폭파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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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뒷모습에서 수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감정은 ‘체념’이었다. 그 체념은 어쩔 수 없어서 포기하는 것과 달랐다. 스스로의 선택이었고, 그래서 끝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반항과도 같았다. 해당 장면은 누군가를 바꾸려 하는 게 얼마나 덧없는 일인지를 보여줬다. 상담자에게는 내담자의 뿌리 박힌 경험을 읽어내고 그의 괴로움이나 갈등을 상담자 자신이 아닌 내담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통찰을 건네주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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