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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자전거로 23km를 달리고 깨달은 것

by 나탈리

새벽 6시, 새가 두텁게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비몽사몽한 나와 달리, 여름의 도시는 이미 깨어 있었다. 햇살을 머금은 황토색 건물 위로 가을 낙엽 같은 기와가 덮여 있는, 마치 중세 시대에 온 듯한 인상을 주는 이곳은 몬테풀치아노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남부에 위치한 이곳은 해발 605미터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모카 포트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남편은 발 도르챠에 가고 싶어 했다. 토스카나 지방 하면 떠오르는, 높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심어진 길을 촬영하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자전거를 타야 했기에 우리는 서둘러 움직였다. 멀미가 날 정도로 굽이진 길을 삼십여 분 가니 자전거 대여점이 나왔다. 직원이 친절하게 자전거 사용법과 지도를 다운로드받는 법을 알려주었다.


“완주할 수 있을까…?”
“e-bike니까 괜찮을 거예요.”


첫발을 떼었다. 조금 달리니 오르막길이 나왔다. 시지프스처럼 상체를 잔뜩 구부린 채,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을 올랐다. 한참을 오르니 몬티셀로의 전경이 보였다. 연두색의 능선이 입체적으로 겹쳐 있었고, 그 앞으로는 베이지색의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짙은 녹색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거인국에 온 기분이었다. 이토록 광활한 자연에 둘러싸여 본 적은 처음이었다. 경외감이 들었다. 이천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났을 거다. 그들은 사라졌고, 자연은 남아 있다.


도착점까지 20km나 남아 있었다.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세월을 먹고 자란 사이프러스 나무길을 지나갔고, 좁은 비포장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클래식한 자동차가 우리 곁을 천천히 지나갔다. 자동차가 흙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졌다. 중세 시대 마차를 타고 가던 귀족 영애처럼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가 부딪히기를 반복해, 굳은살이 배길 즈음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다. 이제 10km를 달렸을 뿐인데 너덜너덜해졌다.


“Cheers, mate! (힘내요!)”
“Almost there! (거의 다 왔어!)”


자전거의 성지답게 프로 사이클러 무리가 지나며 우리에게 소리쳤다. 그래, 다시 달려야지. 힘을 내 페달을 밟았다. 아무리 가도 뷰포인트의 ㅂ도 보이지 않았다. 고수들이 말하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보와 다른 뜻을 가진 게 분명하다.


더는 토스카나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나와의 싸움을 하느라 바빴다. 분명 남편이 전기 자전거라 편할 거라고 했는데. 몇 번이고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되돌아가는 시간이 더 걸릴뿐더러 다시 비포장도로의 모래를 마시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로마에서 이미 9km나 걸었는데, 이건 못 할 게 뭐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 시간을 더 타고 나서야 뷰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멜론과 수박, 물 한 병을 순식간에 헤치웠다. 아까의 허무함은 마음속에서 완전히 증발했다. 무한한 시간을 지나온 자연 앞에 인간의 유한한 삶은 태어났다 바스러지길 반복하는 낙엽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새 생명을 틔워내는 나무처럼, 살아 있는 동안은 있는 힘껏 살아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오후 세 시쯤 피엔자에 도착하니,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마을을 누비고 있었다. 주린 배를 채우고 되돌아갔다. 몬티셀로로 가는 길은 다행히 내리막길이었다. 자전거 대여점으로 돌아오니 네 시간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엉덩이가 욱씬거리고, 허벅지가 축구선수처럼 부풀고, 정신은 혼미했다.


“발 도르챠를 완주한 기분이 어때요?”
“말도 마세요. 엄청나게 좋았는데, 엉덩이가 배겨서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 No pain, no gain!”


초췌해진 우리의 얼굴을 본 직원이 물 두 병과 에스프레소를 주었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어 가며 삼십여 분 동안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Grazie mille (정말 감사합니다).”
“Prego (천만에요).”


가게 안에 진열된 짙은 녹색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닮은 색감 위에 흰색의 ‘발 도르챠’ 로고가 프린팅된 기념 티셔츠였다. 빈손으로 가기 아쉬워 한 장 집어들었다.


몬테풀치아노로 돌아가는 차 안, 지는 해가 우리를 따라왔다. 방금까지 우리가 속해 있던 풍경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차가 덜컹일 때마다 온몸이 쑤셨지만 마음만큼은 활기찼다. 힘든 순간은 결국 지나갔고, 남은 것은 버텨낸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23km를 달린 끝에 마주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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