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초년생의 커피값, 그 쌉싸름함에 대하여
“시아 커피 고!”
큰일 났다. 이 고에 흔쾌히 응했다가는 광박에 피박을 면치 못한 사람처럼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지.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한 손은 마우스에 고정한 채 다른 한 손을 들어 가볍게 저어 보였다.
“난 괜찮아. 다녀와”
휴. 이 정도면 잘 넘긴 건가. 왜 그러냐고 더 물어보진 않겠지. 그나저나 오늘은 이렇게 넘긴다 쳐도 앞으론 어떡하지라는 고민이 이어지려는 찰나.
“시아 어디 아파요? 아님 뭐 급한 이슈 있어? 도와줄까?”
아차. 내가 간과한 두 가지 사실. 첫 번째는 내가 출근하자마자 커피부터 사고 업무를 시작하는 카페인 중독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중독의 길을 나란히 걸어온 나의 동료가 무척 다정한 성격이라는 것이다.
“아냐. 실은 나 오늘부터 카누 타 마시려고.”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동료와 나 사이엔 암묵적인 루틴이 하나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짓을 보내고, 자연스레 사내 카페로 향해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내가 사고, 어떤 날은 동료가 샀다. 그렇게 매일 아침 우리는 커피를 주고받으며 카페인과 동료애를 쌓아갔다.
“아 뭐야. 시아 설마 돈? 내가 살게 가자 가자.”
이럴 줄 알았어. 그녀는 평소 나뿐만 아니라 주변 동료들에게 잘 베푸는 사람이었다. 내가 스틱커피를 마시겠다고 하면, 매일 내 커피를 미리 사놓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이래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결국 나는 못 이기는 척 동료를 따라 나가 커피를 얻어 마셨다. 그다음 날도 그랬던가. 그것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커피가 유달리 고소하고 시원했던 것은 기억난다. 다만 그 끝에 지독한 씁쓸함과 오묘한 수치심이 남았을 뿐.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이거 아껴서 뭐 얼마나 더 모으겠다고.
이쯤에서 밝혀야 할 사실은 내가 회사 생활의 작은 즐거움이자 동료와의 우정의 기반이었던 출근 커피 루틴을 저버리면서까지 아끼려던 커피 값이 한 잔에 800원이라는 사실이다. 사이즈업을 해도 1100원이었으니 당시 사내에 이 커피값을 아끼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적어도 내 주변 동료들은 그랬다. 나를 포함해서.
그러니 매일 두 잔은 거뜬히 마시던 사내 커피를 끊고 스틱 커피를 마시겠다고 얘기하지 못한 이유가 다정한 동료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아니었다. 기저에는 800원짜리 커피 한 잔 앞에서도 인색해지는 구질구질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다.
매일 사천백 원짜리 스타벅스를 마시는 것도 아니고, 천 원이 안 되는 사내 커피마저도 절제해야 하는 삶이라니. 이것은 취준생 시절, 저렴하게 산 대용량 스틱 커피를 연료처럼 타 마시며 꿈꾸던 직장인의 삶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직장인이 되면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여유롭게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단골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출근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침잠이 많아 매일 머리도 겨우 말리고 다니면서 어떻게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에서 무려 ‘여유’씩이나 가지고 드립 커피를 마시겠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랬다. 로망이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당시 나의 월급은 아주 작고 귀여운 수준이었다. ‘커피도 못 사 마실 거면 일을 왜 해’라며 커피 한두 잔 정도를 사 마실 수준이긴 했으나, 그렇게 하루하루의 만족을 위한 소비를 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 딱 하나 남았다. 허무함. 시간이 갈수록 동료와 마시는 사내 커피도 좋지만, 여유로운 드립 커피 쪽에 닿고 싶었다. 지옥철의 출퇴근을 끝내고 회사 가까운 곳에 나만의 거처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럼 머리도 말리고 드립 커피도 마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원대한 꿈을 안고 바짝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앙증맞은 월급에서 80퍼센트 정도를 적금으로 때려 넣고 나면, 정말 숨만 쉴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 수중에 남았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서 살아도 월급 받기 일주일 전만 되면, ‘만원의 행복’에 뒤지지 않는 짠내 나는 보릿고개가 펼쳐졌다. 그러니 제아무리 사내 카페가 저렴한 들 별수 있나. 서울에서 수원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 공유 오빠를 찾아가는 수밖에.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지금,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일리 커피 머신으로 내린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쓴다.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내려 마시는 드립 커피는 금액과 시간의 문제를 떠나 부지런하고 느긋한 성격의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대신 바라던 회사 근처의 작은 오피스텔로 독립에 성공했고, 해가 잘 드는 집에서 매일 두 잔 정도의 커피는 고민 없이 내려 마시게 되었다. 여전히 한 달 커피값을 조금이라도 아껴보고자 대용량으로 커피를 구비해 두곤 하지만, ‘오늘은 기분 좀 내볼까’ 싶을 땐 서슴없이 밖으로 나가 커피를 사 오기도 한다. 커피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종종 그때의 내가 생각난다. 이천 원짜리 빽다방은 고사하고, 구백 원짜리 사내 커피도 참아냈던 시절. 텀블러에 카누를 타 마시며 꿋꿋이 그렸던 그림에 지금의 나는 얼마쯤 닿아있을까. 커피가 유난히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