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아 Jun 07. 2024

아빠의 투자 실패기

선택적으로 셈이 약한 사람




안과에서 시력이 많이 나쁘고 근시가 심하다는 얘기를 듣고 나왔다. 참 그랬지. 나 시력이 많이 나쁘지. 이렇게 살아온 지 너무 오래라 이런 얘길 들으면 새삼스럽다. 시력이 괜찮은 평범한(?) 사람들은 훨씬 더 선명하고, 더 멀리 보며 살아가겠구나. 이야 나에게만 흐릿한 세상. 세상은 정말 불공평해. 


내가 언제부터 눈이 나빴더라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안경을 써야 할 정도로 시력이 떨어졌던 거 같다. 근데 나는 그때 바로 안경을 쓰지 않았다. 아빠가 한 번 안경 쓰면 평생 써야 한다며 1년 정도 나를 안과에 보냈다. 뭐 약도 넣고, 최대한 시력이 떨어지는 걸 막아주는 어쩌고 저쩌고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연히 결과는 대참패. 잠깐 시력이 떨어지는 게 주춤하긴 했으나 결국 일이 년 후쯤은 안경을 쓰게 됐고, 아빠의 투자는 망했으나 예언은 정확했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안경쟁이로 살고 있다. 그때는 몰랐지. 평생 안경을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으면 좀 더 치료와 관리에 적극적이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안약도 대충 넣고, 맨날 어두운 방에서 책 보고 그랬다. 아빠가 내 방에 들어와서 불 켜주던 기억이 많다. 눈 나빠진다고 불 켜고 보라는 말과 함께(또 하나 새삼스러운 사실은 이때만 해도 늦은 밤 내 시력을 떨어트리는 건 책이었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애석하지만 아빠의 투자 실패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아빠는 내 키에도 상당한 돈을 썼다. 늘 작은 키에 속했던 나는 키 크는 한약도 오래 먹었고, 양약과 영양제는 당연했으며, 키 크는 침을 일 년 넘게 맞으러 다녔다. 집에 거꾸리는 당연히 있었고, 성장판 검사도 두 번인가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건방졌던 게 처음 성장판 검사했을 때 예상 키가 154cm라고 해서 말도 안 된다고 기분 나빠하며 나왔었는데(현재 내 키는 153cm이다). 나에게 주어질 뻔했던 1센티마저도 후천적 노력으로 날려먹고야 말았다. 약도 밥도 대충 먹고, 역시나 간절하지 않았기에. 


이런 이력들을 떠올려보니 훗날 아빠의 주식 대실패기는 어쩌면 예측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 집이 꽤 잘 사는 줄 알고 자랐다. 그건 아빠의 주식 실패 전이기도 했고, 주변이 다 엇비슷해 보이는 작은 우물에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빠의 잘못된 계산법 때문이었다. 어려운 형편을 뚫고 명문고를 나와 장학금을 받고 수학과에 갔던 이과 인간 그 자체이자, 현실적이고 수가 빨랐던 나의 아빠는 딸에게는 수지 타산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아 어리석은 양반이여…


그런 셈에 약한 아빠를 둔 행운으로 나는 재능유무나 실제 집안 형편과는 상관없이 약간의 흥미만으로도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며 자랐다. 발레, 수영, 태권도, 피아노, 미술, 논술 등등. 아람단도 했었다. 한두 번 입고 말 제복까지 풀세트로 맞춰가며. 생각해 보면 예체능엔 딱히 재능도 없거니와 심지어 성실하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대체 뭘 믿고 다 시켜줬던 걸까. 아 태권도는 예외. 아빠는 내가 너무 작아서 어디서 맞고 다닐까 봐 태권도만큼은 강제로 다니게 했다. 검은띠를 따면 그만두게 해 준다고 해서 눈물로 검은띠를 땄다. 덕분인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았으니 이건 나름대로 성공한 투자인가.


처음 안과에 갔던 이유는 근래 들어 오른쪽 눈이 불편해져서였는데, 눈에 흉터가 많아서라고 했다. 다행히 2주 만의 두 번째 방문에서 눈에 났던 상처는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상처가 나아져 이번엔 이상한 초록 x가 돌아다니는 꽤나 본격적인 기계로 추가 사진도 찍었는데, 눈에 다른 병이 있거나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안도감이 들었다. 내심 무서웠기에. 나는 시력도 나쁘고, 근시도 심하고, 렌즈도 오래 꼈고 또….



아빠의 녹내장. 



불현듯 왜 그게 떠올랐을까. 냉장고 도어 칸 제일 위 칸에는 늘 아빠의 안약이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전주집에도 있었으니까. 그때는 아빠도 많아야 40대 아니었나? 아빠의 오랜 녹내장을, 혹여나 내 눈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할 때야 떠올린다는 건…. 역시 나의 아빠는 투자자로선 꽝이다. 


그래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던가. 그간의 실패를 교훈 삼았던 건지 그는 고등학생이 된 딸에게 성인이 되면 첫 대학 등록금만 내주고 손 뗄 거라며 으름장을 놓곤 했었는데. 그 뒤론 저 어디 지리산 산골에 들어가서 자연인처럼 살 거라고. 그때는 아빠가 정말 지리산에 들어가서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 물정을, 나의 아빠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너무 몰랐기 때문에. 세상은 당연히 만만치 않고, 아빠는 말보다 한참을 물렀으며, 나는 생각보다 뻔뻔해서. 등록금을 시작으로 대학을 모두 아빠의 주머니를 털어 다니고서도 주변을 돌아보다 틈이 나면 아빠를 원망했다. 왜 아빠는 서울에 자리 잡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다른 애들처럼 집 걱정은 없었을텐데. 왜 나를 유학 보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다른 애들처럼 영어를 잘했을텐데. 왜 내가 독립하는 데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다른 애들처럼……. 


그렇게 그는 실패한 투자자답게, 환갑의 나이를 맞이하고 나서도 다 큰 성년의 딸에게 생활비를 다달이 보내주고 있다. 지리산 날다람쥐를 자칭하던 그는 얼마 전 지리산 입구에서 갑자기 눈앞이 팽 돌아 산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나는 아빠도 이제 늙은 거라고 웃으며 놀렸지만, 다행히 그에게서 지리산을 앗아간 사람이 누군지 정도는 알 만큼 자랐다. 누군가의 지리산을 뺏어 먹고 자란 덕분에. 


내 목표는 단출하다. 집을 사주느니 차를 바꿔주느니 같은 대단한 효도는 애초부터 내 능력밖이라 여겨 욕심내지 않았다. 그저 아빠가 이제는 본전도 못 찾는 투자를 부디 멈추고, 그저 본인 몫만큼만 짊어지고 살게 하는 거. 그렇게 아빠의 녹내장이 존재감을 더 키우기 전에, 자연인을 소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사라지기 전에 아빠가 지리산 근처에나마 닿을 수 있게 하는 거. 그거 하나 바라는 건데. 그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일일까.

작가의 이전글 구부러진 채 여전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