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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예희 Aug 30. 2018

혼자 꾸려가는 조직에 대하여

치앙마이 구시가의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테이블 위엔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와 큼직한 흰색의 파이가 놓여 있는데, 이 가게의 시그니처 디저트라는 코코넛 크림 파이다. 살짝 물컹거리는 듯 하면서도 속은 단단하고 아삭한, 싱싱한 코코넛 과육을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듬뿍 넣고 위에는 뽀얀 머랭을 얹어 구웠다. 버터 냄새 물씬 풍기는 타르트 바닥까지 아주 맛있다. 이건 이 카페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건 아닌데, 치앙마이의 어지간한 디저트 전문점에선 으레 코코넛 파이, 코코넛 케이크를 자기네 시그니처라며 열렬히 권한다. 그만큼 싱싱한 코코넛 수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겠지. 아삭아삭한 이 질감, 하이고, 정말 끝내줘…


라고 생각하며 책은 읽는 둥 마는 둥, 코코넛 크림 파이를 마지막 한 입까지 싹싹 긁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창밖을 슬쩍 쳐다보니 밖은 슬슬 해가 지려는 모양이다. 태국 북부 지방이라 꽤 시원하긴 해도 한낮엔 역시 태국답게 덥긴 덥다. 뙤약볕 아래 돌아다니는 대신 마사지를 받거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피서를 하다 지금처럼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슬슬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면 딱 좋다. 오늘은 어딜 갈까, 야시장에나 가볼까 하며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데, 카페 문밖을 한 걸음 나서자마자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건다. ‘저기, 한국분이세요?’ 네, 하고 돌아보니 뒤이어 빠른 자기소개가 이어진다. 이름과 나이 같은 인적 사항이 아니라 현재 상황 소개다. 어제 이 도시에 도착했고, 혼자 여행하는 건 난생처음이라는데 그 눈빛이 간절하다. 너무 간절해 보인다. 지금부터 뭐 하실 거에요, 어디 가실 예정이세요 하고 묻는데, 어디가 되었든 함께 가고 싶다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알겠습니다, 여인이여. 저와 함께 가시죠.


‘저는 혼자서는 뭘 못 사겠더라구요. 좀 무서워서요.’ 야시장으로 가는 길에 그가 말했다. 뭐가 무섭다는 것일까? 바가지를 쓸까 봐?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낯선 장소라서? 환율 계산이 복잡해서? 혹은, 전부?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그래도 시장에 도착해 물건 구경을 하기 시작하니 긴장이 풀리는지 표정이 밝아진다. 이 가게, 저 좌판, 구석구석 함께 돌아다니는 사이 그는 어느새 알록달록한 태국 전통 무늬를 수놓은 지갑과 파우치, 실크 스카프와 귀걸이, 거기다 신발까지 야무지게 고른다. 처음엔 뭐 하나 살 때마다 ‘이거 괜찮을까요, 한국에서도 하고 다닐 수 있을까요?’ 라며 너무 화려하거나 과한 건 아닌지 연신 확인하길래 그럼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하고 부추기니(질러요 질러!) 슬슬 흥이 나는 모양이다. 아예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방금 산 거로 갈아신기까지 한다. 아마도 이게 당신의 본모습이 아닐까요, 조금 전까진 너무 긴장해서 그런 거구요. ‘오늘 정말 감사해요. 혼자서는 야시장에 못 갔을 거에요.’ 헤어지면서도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아휴, 아니에요. 앞으로 여행 경험이 착착 쌓일 거고, 그럼 분명히 오늘보다 더 여유로워질 거에요. 웃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혼자 살아요, 혼자 일해요, 혼자 여행해요, 혼자 밥 먹어요. 무엇에든 익숙해지려면 일단 해보는 게 먼저고,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며, 시간과 노력도 꽤 들여야 한다. 내 시간을 혼자 보내는 일도 그렇다. 이런 삶의 형태가 맨 처음부터 몸에 착착 감기진 않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라,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데, 라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에 새로운 선택의 여지가 생기는 순간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순간.


우리는 항상 어딘가에 소속되어 살았다. 학교든, 학원이든, 회사든, 어떤 큰 덩어리의 일부가 되어 함께 굴러갔다. 그중에서 스스로, 자진해서, 능동적으로 소속된 경우는 얼마나 될까? 성인이 되기 전에는 대부분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자, 여기서 이만큼 오래 굴렀으니 다음엔 저기로 가라. 졸업장 하나 줄 테니 이거 들고 가. 수동적으로 이동되어 다시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왜 여기에 온 것이며,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궁리해서 실행하는 대신 지시에 따라 살았다. 자, 저기 목표 보이지? 일단 저기까지 가서 저 별을 따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 그 별은 좋은 대학교를 의미했다. 어렵사리 손에 넣어 대학교에 입학하니, 어라, 별의 이름이 어느새 바뀌었네. 뭐겠습니까, 취업이죠. 자, 취업했으니 그다음 별을 따볼까? 착착 승진해야지, 결혼도 해야지, 아이를 낳고 양육해야지. 하나가 뭐니? 둘은 낳아야지! 나름 열심히 구르고 달렸지만, 별은 여전히 저기 저 애매한 위치에서 사람 약 올리듯이 반짝거린다. 그런데 저거, 별이 맞긴 맞아?


그리고 단체라는 곳은, 어떤 이름이고 어떤 형태이든 소속감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러분 모두 이걸 할 줄 알아야 하고, 이걸 먹을 줄 알아야 하며, 뭘 하든 함께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억지로 술을 먹이고, 회식 자리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급식을 남기지 못하게 압박하고, 때로는 이걸 다 먹기 전엔 집에 못 갈 줄 알라며 협박하기도 한다. 소속감 하면 단체복 아니겠냐며 똑같은 옷을 들이밀고는 몇 안 되는 사이즈 중에서 선택하라 강요한다. 사이즈가 잘 안 맞는다구? 옷은 죄가 없으니 네가 잘못했네. 살 좀 빼지? 아니 그 옆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말랐어? 살 좀 찌지? 사회생활의 꽃은 회식과 워크숍, 그리고 주말 등산이니 전원 참석해야 하고, 명절엔 모여야 맛이니 모두 한 집에 복작복작 끼어 앉아야 한다. 텔레비전 리모컨은 내가 쥘 테니 너는 과일 좀 가져와서 깎아봐라. 얼른.


나는 뭐 하나를 먹어도 내가 직접 고르고 싶다. 정해진 코스 요리도 좋지만, 메뉴를 쭉 읽어봐도 그다지 끌리지 않을 땐 첫 코스부터 디저트까지 내 손으로 조립하는 게 좋다. 내가 소속될 곳도, 내가 목표로 할 별도 내가 고르거나, 아예 직접 만드는 게 좋다. 너무 멋대로 사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더 엄격해지고 더 빡빡해진다. 혼자 일하고 혼자 산다고 해서 무작정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 방임과 퇴폐향락, 왠지 싱글의 2대 인생 목표일 것 같지만 어휴, 그거 쉽지 않습니다. 많이들 오해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늘 신예희 씨네 집에 가자! 예희 씨네 집에서 술 마시자! 밤새자!’던가 ‘신예희 씨는 자유인이라 좋겠다, 다들 가정이 있는데 자기는 그런 거 없잖아!’ 같은 말을 종종 듣지만, 그때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다. 제대로 오해하고 있구만. 나는 1인 가정의 매니저이고 프로듀서다. 이 조직 안에 구조가 존재하며 조직원(나)에게 최적화된 규칙이 있다.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있다. 그러니 이 조직은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하루 이틀하고 말 것 아니거든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엄친아나 엄친딸 같은 말도 의미를 잃을 것입니다.’ 김영하 <말하다>


이 문장에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가만히, 조용히 생각해본다. 나의 내면은 견고한지, 그저 견고하기만 한지 아니면 견고하면서도 유연한지 생각한다.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건 아닌지, 온통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건 아닌지 생각한다. 외장재와 내장재에 방염과 방오가공이 제대로 되었는지 생각하고, 비상 탈출구를 제대로 갖추었는지 생각한다. 나 혼자 꾸려가는 1인 조직,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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