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서 접한 여러 사실의 조각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추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를 검증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물밑의 맥락이 문득 떠오를 때 드는 짜릿함이 있다. 그렇게 문득, 어쩌면 '반면교사'는 우리의 삶에서 기능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언젠가 우리의 뇌가 부정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영상을 보았다. 부정할수록 오히려 더 강조되어 그것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외침에 코끼리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눈 덮인 산길을 내려가는 스키 선수가 '나무에 부딪치지 않겠다'가 아니라 '길을 따라가겠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스키선수의 입장에서는 길에 집중하는 가운데 부딪치지 말아야 할 나무를 자연스레 피하는 것이다. 반면교사란 말 그대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는 깨달음이다. 후진 것을 보며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부정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러지 않겠다고 되뇔수록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무언가를 부정적으로 여기고 싫어할수록 은연중에 닮아 가는 것과도 비슷한 것 같다. 그러니 반면교사는 한 번의 순간으로 족하다. 한 번의 깨달음 이후에는 반드시 나만의 방향이 따라와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에서 그칠 게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를 되뇌야 다음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가져가고 다듬을 수 있다면 단정한 일상을 꾸리는 것도 그렇게 머나먼 꿈만은 아닌 것 같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나만의 시선에 매몰되는 일이 조금씩 줄어들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살아내는 방향으로 또 한 걸음 내딛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