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이야기

서점에 갔다. 오늘도. 여기에는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신간과 시간의 세례를 받은 고전들이 사이좋게 누워있다. 당신은 언제라도 원하는 책을 부둥켜안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 왔네. 저 사람.


긴 머리 남자. 머리가 길면 간수라도 잘 할 것이지 잘 감는 것 같지도 않다. 떡이 져 있어서 그 옆을 지날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나만큼이나 이 곳에 자주 온다. 무협지 코너에 앉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책을 정독한다.


얼마 전에 그가 책을 훔치는 걸 봤다. 무심코 그가 있는 쪽을 보았는데 그가 읽고 있던 책을 스르륵 군용 점퍼 안에 넣고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왜일까. 난 못 본 척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가 머무는 곳은 사회학과 정치학 코너이다, 그가 머무는 곳은 무협지 코너이고. 그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왜 매일 여기에 오는지 궁금해 할까? 그와 내가 이야기 나누는 일은 없겠지만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를 본다면 난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왜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요?”


일주일 후 서점이다.

“이봐요. 당신 말대로 훔친 게 아니면 이 책들은 다 뭐야? 경찰서 갈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울리는 쪽을 본 순간 난 몸이 굳어버렸다. 무협지 남자와 경찰이 카운터 옆에 서 있었다. 경찰은 남자의 가방을 홱 낚아채서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 붓고 있다. 바닥에 펜과 종이, 연습장 그리고 책들이 쏟아졌다. 아마도 누군가 그를 신고한 듯했다. 나도 모르게 그 쪽을 향했다.


“제가 이 사람한테 골라놓으라고 한 거예요.”

난 경찰 앞으로 나섰다. 태연하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가슴이 두근거려 목소리가 떨렸다.

“당신은 누구야? 괜히 끼어들지 말고 일 보쇼.”

나는 바닥에서 무협지를 들어올렸다. 다섯 권짜리 용의 협곡 시리즈였다.

“와, 이거 재미있겠다. 재미있는 거 잘 골랐네.”

책을 들고 가 계산을 하자 오만원이 나왔다. 웬일인지 아깝지 않았다. “됐죠? 경찰 아저씨.” 무협지 남자에게 책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가 책을 받아들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에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고개를 찌푸릴 새도 없이 그는 내 앞을 지나 서점 밖으로 내달려 나갔다.


자꾸 그가 있던 쪽을 기웃거리게 된다. 우습다. 그와 내가 무슨 사이였다고. 책이나 보자. 사회학 코너에 가서 ‘세계화의 두 얼굴’ 이란 책을 집어 들었다. 자꾸 날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와 내 옆에서 멈춘다. 몇 번 책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던 적이 있는 직원이다.


“오늘이 그 놈 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당신이 말아먹었어. 뭐야, 당신도 한패지? 내가 아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관찰할 거야. 이 쌍 거지새끼들. 맨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는 거 없이 와 있는 잉여새끼들. 아우 열불나.”


헉. 갑자기 무서워져 뒷걸음질을 쳤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일주일 동안 왜 이리 안 오셨어요. 매일 같이 오시더니.”

바리스타가 삐에로처럼 큰 웃음을 띠고 날 맞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여길 안 온 사이 그의 가슴팍에 스마일 뱃지가 달려 있었다.

“더 웃으세요. 더. 더 친절하게 못해?”

옆에서 매니저가 그를 닦달했다. 그는 입이 찢어질 듯이 웃었다. 하하하 알겠어요. 더 친절한 제가 되겠어요.


그 곳을 나와 분식 코너로 갔다. 분명 참치 김밥을 시켰는데 참치 김밥 옆에 치즈김밥 반 줄이 더 있었다. 놀라서 주방 아줌마를 쳐다보자 “아, 맨날 참치 김밥만 먹잖소. 서비스요,”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줘도 지랄이야’ 하고 입속으로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나빠져 치즈김밥을 고스란히 남겼다.


“예쁘죠? 올해 신상이에요.”

금박 블라우스와 검은색 레깅스를 입고 흰 날개 달린 검은 비니를 쓰고 있는 마네킹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점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 알아요?”

점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별 미친년을 다보겠다는 표정이었다. 휴.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바꿔 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거울 속에는 소매가 날름거리는 검은 코트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다 구겨진 갈색 구두를 신은 내가 있었다.

점원은 거울 속 나를 한참 째려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기 옷 입고 나오세요. 번쩍이는 옷으로 바꿔 입고 나오자 내가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난 그녀에게 엄마가 꼭 필요할 때만 쓰라고 신신당부하며 주신 신용 카드를 내밀었다. 내친김에 일층에서 선글라스도 사고 메이크업도 받았다.


삼층 서점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았다. 난 안심하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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