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혼자 느긋한 시간을 지내고 있다고 자위하려 했지만 내심 누구라도, 내 곁에 와 앉아주었으면 했다. 저만치, 흰 피부에 스키니진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말쑥하고 댄디한 스타일.
쓱,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내밀면서 내 옆에 와 앉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콘을 쥐었다. 하지만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뭐지, 이 친숙한 느낌은.
-믿을 수 없겠지만 말할게요. 우리는, 만날 수 있었던 인연 중의 하나입니다. 당신은 가고 싶은 대학에 가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다른 대학을 선택했지요. 만약 당신이 가고 싶었던 대학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연인이 되었을 거예요. 새내기인 당신은 도서관에 가서 복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때 당신은 빨간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죠.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이 내 과거사를 어떻게 다 아는 걸까. 말도 안 돼. 그의 그윽한 눈빛은 나를 사랑스럽게 향해 있었다. 정말 나는 그랬다. 처음 정한 학교에 가지 못하고 다른 대학을 선택했다. 그는 내가 대학교 일학년 때 빨간색 블라우스를 입고 다닌 건 어떻게 알고. 정말 그랬었다. 다소 튀고 싶어서 나는 벼룩시장에서 본 빈티지 블라우스를 입고 다녔었다. 아이스크림을 보고 놀랐다.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전혀 녹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길을 알려줍니다. 일교시에 늦었는데도 난 당신을 따라갈 뿐이죠. 당신이 복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하죠. 커피 한잔 사달라고. 알려준 값을 해달라고. 당신은 피식 웃습니다. 난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왜냐면, 내 심장이 뛰고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의 심장은 나란히 노래하면서 캠퍼스를 걷습니다.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난 지난주에 사년이나 사귄 남자, 대학교 이학년 때 만나 군대를 기다려주었던 그 남자에게 잔인하게 차였다. 네가 지겹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사흘밤을 잠을 못자다가 서울역에서 경주행 열차를 샀다. 기차 안에서 내내 울먹이며 왔다. 와보니 보문 공원에서 벚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수많은 연인들이 오가는 속에서 개밥의 도토리마냥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거였다.
-그거 알아요? 당신과 나는 천생연분의 연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요. 우리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는 나와 당신의 새끼손가락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주었죠. 당신이 그와 헤어진 이유를 알죠. 당신은 그에게 과도하게 의지했고 그 사람은 그런 당신이 버거웠을 겁니다.
-날 그 세계로 다시 데려가주세요. 우리 거기서 다시 시작해요.
따듯한 그의 품에서 난 펑펑 울었다.
-그래요. 알겠어요. 과거를 바로잡으려면 정성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과거는 당신만의 과거가 아니라, 업이에요. 당신 집안의 업이 있는 겁니다. 그 업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그는 확신에 차 말했다.
오 만원부터에요. 가격이 높아질수록 정성이 들어가요. 내시고 싶은 만큼만 내면 돼요.
오 이런 젠장. 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땅에다 내팽개치고 밟아 버렸다. 그의 운동화에 아이스크림이 튀어 흔적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