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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30. 2020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말도 없이.”

전화기 속 남편의 목소리에 화가 차올라 있다. 

“출근할 때만 해도 어디 간다는 말 없었잖아.”     


그래, 그랬었지. 나도 몰랐어. 내가 갑자기 여기에 올 줄은. 

이렇게 말하면 믿어줄까. 더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됐어.”

전화기 너머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띠띠띠. 전화가 끊겼다. 그가 끊어버린 것이다. 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이상하게 안도감이 든다.      


난 지금 전주에 있다. 결혼하기 이 삼년 전, 친구와 놀러 왔던 곳이다. 생과일주스를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길거리 음식을 마구 사먹으며 진탕 놀았던 기억이 난다. 삼 만 원인가를 냈을 뿐인데 술상이 세 번 바뀌는 막걸리 집에서 ‘여기가 지상천국이다’ 하면서 기뻐했었다. 그 친구는 지금 미국에 있다. 그 때도 고민이 있었을 텐데, 그 당시의 나를 돌이켜 보면 그저 해맑게 웃는 얼굴이 기억날 뿐이다. 지나면 다 추억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어디로 갈까. 갑자기 찾아온 자유가 새로 산 옷처럼 어색하다. 생각해 보니 결혼하고 혼자 여행을 온 건 처음이다. 커피 한 잔 하러 가자. 커피를 마시고 나면 이 여행이 익숙해질 것 같다. 

그래, 그 곳으로 가자. 나무 카페. 난 그 카페를 노란 집으로 기억한다. 큼직한 대문부터 노란색이다. 노란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작은 정원이 있다. 한옥의 얼개를 살리고 최소한도로 개조하여 운치가 넘친다. 한옥 내부 뿐 아니라 정원에도 노란색 전등이 많아 저녁이면 ‘반 고흐’의 작품 ‘밤의 카페’처럼 따스한 빛을 내뿜는다.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은 팔달로이다. 스마트 폰 상으로는 노란 집이 팔달로에서 멀지 않다는데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예전에는 어떻게 찾아갔던 걸까. 이리 저리 마음 끌리는 대로 걷다 보니 전동 성당이 보인다. 여기가 한옥 마을 입구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 커피는 여기서 마시자, 하고 노선을 변경한다. 더 걷기에 난 지나치게 지쳐 있다. 가방이 무겁다. 

평일 대낮인데도 한옥 마을은 사람들로 붐빈다. 대로변 좌우에는 아이스크림 가게, 기념품 가게, 식당들이 즐비하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 연인들 말고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다. 지나다니다가 서로 어깨를 부딪칠 정도이다. 그 안에서 혼자 걸어 다니자니 좀 외로워진다. 사람들을 피해 골목길로 빠진다.

대로변에서 한 발자국 들어왔을 뿐인데 길이 놀랍도록 한산하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꼭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 같다. 마침 카페가 있다. 통 유리창으로 안을 보니 손님이 거의 없다. 내가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나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그 여자는 날 보고 웃는다. 진정으로 맞아주는 웃음이다. 고맙기도 해라. 쌍꺼풀 진 큰 눈과 짙은 눈썹. 화장기가 전혀 없는 긴 얼굴. 순진하고 다정한 얼굴이다. 나도 저런 얼굴을 지닌 시절이 있었을까.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 타로를 봐주면서 친해질까. 


화장실에 다녀오자 옆자리 테이블에 여고생으로 보이는 여자 네 명이 앉아 있다. 각자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다. 

“어디서 왔어요?” 물어보니 “창원이요.”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타로 봐줄까요?”

여고생들에게 제안한다. 

“우와, 나 먼저. 나 먼저.” 내게 “창원이요” 하고 답했던 아이가 뛰어온다. 통통하고 잘 웃는 아이다. 가방에서 타로 카드를 꺼내 펼친다. 아이들은 카드만 보고서도 감탄을 한다. 두 명에게 연애 상담을 해주었다. 뒤이어 가장 새침해 보이는 여자 아이가 내 앞에 앉는다. “저도 남자친구 생길지 물어볼게요.”

“남자에 대해서 별로 궁금한 거 같지 않은데.” 떠오른 대로 말하자 그 아이는 깜짝 놀라는 것 같다. “정말 알고 싶은 것에 대해 물어봐요.” 

“성적이 오를지 봐주세요.”

그 아이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카드를 섞고 아이가 원하는 카드를 열 장 고르도록 한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인가 봐요. 이렇게 살면 나중에 마음이 지쳐요. 너무 참지 마요. 표현하고 살아. 그래도 돼.”

말을 하는데 왠지 내 마음이 뜨거워진다. 내 말이 끝나자 갑자기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난 나오는 대로 카드를 읽었을 뿐이다. 이 아이도 내 과거의 어느 부분을 공유하고 있구나. 아마도 그 말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인 듯하다. 참지 마. 

아이들이 떠나자 기운이 다 쑥 빠진다. 카운터 여자에게도 타로 카드를 봐 주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 대신 마지막 힘을 짜내어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가게를 나온다. “감사합니다.”     


참지 마. 참지 않아도 돼.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햇볕을 받으며 골목길을 걷자니 마치 시공간을 초월한 어느 장소에 와 있는 듯하다. 햇살은 부드럽고 나는 고양이처럼 한가롭다. 여기에선 아는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다. 골목길 안 쪽에 담쟁이덩굴로 벽이 뒤덮인 한옥이 보인다. 녹색 대문 안쪽에서 한 남자가 물뿌리개로 정원에 물을 주고 있다. 

“방 있어요?”

한옥에 불쑥 들어서며 그에게 말을 걸어본다. 눈이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어깨가 떡 벌어져 있다. 이십대 후반 같은데 펜션 주인인가. 

“하나 남았는데 보실래요?”

안정감 있는 목소리를 가졌다. 무심함이 마음에 든다. 

정원에 들어서니 온갖 꽃들과 식물이 날 반긴다. 마음이 편해진다. 오늘 묵을 곳은 여기구나. 그의 뒤를 따라 뒤뜰로 들어선다. 바깥채는 안채와 분리되어 있어 작은 정원이 있고 별도로 주방을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정원에는 분꽃과 나팔꽃이 가득하다. 그는 내게 주방을 안내해준다. 주방에는 골동품들이 많다. 전등도 중세 시대의 교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글라스 공예품이다. 아마도 주인은 굉장한 수집가인 것 같다. 커피 메이커가 보인다.


“커피 내려 주세요.”

웃으며 그에게 부탁한다. 그는 찬장을 열고 원두 봉지를 꺼낸다. 곧 주방에 향긋한 커피 향이 퍼진다.  

“고맙습니다.” 그에게 진심을 다해 말한다. 

“아니에요. 저도 마침 마시고 싶어서요.”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 한옥 펜션은 부모님이 운영하는 걸 물려받은 거예요. 원래는 사범대학을 나왔어요. 

오, 이런. 

그와 나 역시도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구나. 나도 지난 사 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그런데 내 길이 아닌 걸 알게 되었어요. 올해 초 실습을 나갔는데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죠. 교사가 있건 없건 책상 위에 발 올려놓고 딴전은 예사에요. 버릇없이 구는 놈한테 쌍욕을 했어요. 보니까 처음엔 열 받아도 몇 년 지나면 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거 같더라고요. 영혼 없이 수업만 하다 나오는 거죠.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동기가 있었는데 난 안되더라고요. 때마침 부모님이 이 일을 제안해서 시작하게 된 거에요.”

그가 고개를 떨어뜨린다. 

“잘하셨어요. 교사라는 직업은 사명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돈 받아먹는 공무원 돼서 연금 받는 날 기다리다 퇴직하는 거예요. 나오길 잘했어요.”

그의 옆모습을 보며 말해준다.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고마워요,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방에서 창문 밖으로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토록 충만한 순간이 있었나 싶다. 집을 떠나오기 잘했구나.      


푹 자고 나니 아침이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열쇠를 반납하러 안채에 간다. 그가 말끔한 얼굴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늘은 어디 가실 거예요?” 그가 묻는다. 

“시내 쪽으로 나가보려고요.”

“네, 여행 잘 하시고 다음에 또 들러주세요.”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한다.      


이제는 정말로 노란 집에 갈 때이다. 노란빛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 오늘 일어나면서부터 난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몇 년 전의 기억을 열심히 되살리며 길을 찾는다. 삼십 분 정도 걸으니 나무카페가 나온다. 노란 문을 보니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없다. 왁스로 잘 매만진 머리와 날렵한 체구를 가진 남자 아이가 날 맞는다. 

“여긴 얼굴 보고 뽑나 봐요?”

남자가 씩 웃는다. 천진난만한 웃음이다.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아메리카노 주세요.” 그는 곧 커피를 가져다준다.

커피 기가 막히게 잘 뽑네. 선명한 맛이 난다. 와우, 대단한데. 난 그를 다시 한 번 쳐다본다. 그때 주인이 들어온다. 살짝 배가 나온 아저씨다. 남자애가 주인에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긴다. 그러자 주인이 “어디 아프신 거 아냐?” 하고 둘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참 평화롭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자니 맘이 편안해진다.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다. 빈 커피 잔을 들고 카운터에 간다. 

“사장님, 한 잔 더 주세요. 커피 맛이 기가 막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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