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했는데 망했다

기대보다 큰 실망

by 솔의눈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누가 봐도 커리어 점프처럼 보이는 선택이었다. 연봉도 올랐고, 회사 이름을 말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도, 친구들도, 전 직장 동료들도 축하를 건넸다.

처음으로 오퍼레터라는 것을 받아봤다. 지금까지 다닌 회사들은 입사 후 근로계약서를 받아 들고 나서야 연봉을 확인하거나, 면접 결과를 알리는 전화에서 구두로 전해 듣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격식을 갖춘 오퍼레터라니! HR 담당자가 보내온 메일에는 입사일에 동봉해야 할 서류 리스트가 꼼꼼하게 적혀 있었고, 사원증에 넣을 프로필 사진을 미리 보내달라는 말도 있었다.

전 직장에서 흰 벽을 배경으로 대충 찍은 사원증 사진이 5년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원증을 거꾸로 매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큰맘 먹고 난생처음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갔다. 전문 포토그래퍼가 찍어준 사진 안에서 멋진 커리어우먼이 싱긋 웃고 있었다.

입사 당일, 미리 보냈던 프로필 사진이 예쁘게 들어간 사원증을 1층에서 건네받았다.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사원증을 찍어야만 열리는 유리문조차 뿌듯하게 느껴졌다. 내가 드디어 이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는구나.
체계적인 시스템, 명확한 전략, 넉넉한 예산. 이것들을 무기 삼아 마케터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입사한 지 몇 주가 지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입사한 팀에는 마케터가 없었다. 팀장님이 혼자서 맨땅에 헤딩하듯 메타, 구글애즈, 체험단 등을 하나씩 시도해봤다고 했다. 민망해하며 건네주신 엑셀 파일에 광고 계정들이 줄줄이 정리돼 있었다.
광고 계정을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더니 매번 다른 팀 담당자를 찾아가 권한부터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스마트스토어 광고 유입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대시보드 접근 권한은 그 팀만의 영역이라고 했다. 나는 담당자에게 간식을 몇 번 갖다주며 친분을 쌓은 뒤에야 통계 화면 '캡처본'을 받을 수 있었다. 매번 사람을 찾고, 설명하고, 기다렸다. 심지어 왜 그런 과정이 필요한지 팀장님에게도 설명해야 했다.

내가 체계를 만들고 상사와 유관부서에게 '마케팅의 기초'를 알려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화려한 이직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 입사 몇 달 만에 '실패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