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을 하세요."
사장님의 피드백은 단호했다.
본부장님이 공들여 만든 내년 사업 계획은 그 자리에서 전부 무효가 됐다. 두 달 동안 쌓아둔 서포터즈 후기, 바이럴 데이터, 광고 성과도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됐다. 사업 방향이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기존에 집행하던 광고도 전면 중단됐다. 집행할 예산도 없었지만 테스트를 해볼만한 소재조차도 없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팀장님은 지금 이 상황이 마케터에게 얼마나 답답할지 안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조금은 며칠이 되고, 몇 주가 되고, 어느새 한 달이 넘었다.
그때부터 억지로 하루를 채우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오전 9시에 출근하면 뉴스레터부터 펼친다. 어피티, 뉴닉, 캐릿, 데일리바이트... 원래는 지하철에서 읽던 것들인데 일부러 회사에서 읽기로 했다. 이건 땡땡이가 아니라 시장조사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최대한 시간이 걸리도록 읽는다.
그다음은 개인 블로그 포스팅이다. 최근에 산 제품 리뷰부터 요즘 이슈까지 닥치는대로 썼다. 바쁠 때는 일주일에 두세 개 쓰기도 빠듯했는데, 지금은 1일 1포, 많은 날은 1일 2개까지 올린다. 새벽에 찍어둔 공부 브이로그 영상을 AI랑 같이 스크립트 짜서 편집하는 것까지 마치면 오전이 끝난다.
오후에는 메타 광고 라이브러리와 구글 광고 투명성 센터를 열어 관심 브랜드들이 어떤 광고를 돌리는지 살핀다. 그 브랜드들의 온드미디어 계정도 쭉 훑어본다. 거기까지 하면 진짜로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뉴스레터 플랫폼에 직접 들어가 최근에 올라온 포스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시작했다. 하반기 트렌드는 이제 빠삭하다. 시험 보면 맞출 자신도 있다.
그래도 시간이 안 흘렀다. 결국 밀리의서재 정기구독권을 다시 끊었다. 소설은 너무 딴짓하는 것 같아서 카피라이팅, 기획 관련 책 위주로 읽는다. 직무와 연관된 책을 읽고 있으면 적어도 지금 이 시간이 완전한 낭비는 아니라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고, 누가 봐도 덜 찔리니까.
화장실을 가면 구직 플랫폼을 열어 새로운 채용공고가 떴는지 확인한다. 마음에 드는 건 북마크해둔다. 그렇게 하루가 끝난다.
옆 자리 팀원은 하루 종일 바빠 보였다. 계속 어딘가와 통화하고 쉬지 않고 타이핑을 했다. 나보다 훨씬 오래 다닌 사람이라 당연한 차이였지만 그 차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눈에 들어왔다. 업무가 잘 풀리지 않는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꼭 '너는 할 일이 없지?'라는 야유로 들렸다.
신규 입사자들을 위한 교육에 참가했는데 다들 몸만 교육장에 앉아있지 눈과 손은 노트북으로 업무를 쳐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혼자만 멀뚱멀뚱 교육을 듣고 있었다. 10년차 과장이 1년차 사원보다 할일이 없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신랑에게 말했더니 오히려 좋지 않냐고 했다. 야근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데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니 그 회사에 오래 다니라고 했다. 신랑은 위로라고 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매일 아침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이 지옥 같았다. 지난 10년간 갈고닦아 온 칼날에 녹이 슬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그즈음 팀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