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27(D+52)_인도/티루바난다푸람
티루바난다푸람은 관광객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래서 하루만 머무르려 했는데 우리가 예약했던 객실이 취소되면서 하루 눌러앉게 됐다. 무얼 할까 뒤적거리다 동물원이 있다 하여 들러보기로 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오랜만에 아들이랑 소풍 가는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인도의 동물원은 딱 기대했던 수준 정도였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인도의 모든 콘텐츠는 질적 미달을 가격 경쟁력으로 커버하고 있는 느낌이다. 숙소, 식당, 관광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부족하지만 가격이 너무 매력적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다. 동물원도 그랬다. 외국인 입장료라 하여 더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내가 지불한 금액은 총 4,500원. 동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비어있었고 어디 하나 편하게 앉아 쉴 곳도 마땅치 않았다.
동물원이 성에 안 차는 것은 괜찮은데 숙소가 그런 것은 늘 골치다. 지금까지 네 곳의 숙소를 거쳐왔는데 첸나이에서 묵었던 좋은 호텔은 제외하면 모두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심지어 첸나이의 좋은 숙소도 심심치 않게 정전으로 불이 깜박깜박했다.) 어느 숙소고 모두 다 깨끗하지 않으니 청결은 접어두고 이야기하자. 마두라이의 숙소는 정전으로 1시간 이상을 암흑 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칸야쿠마리에서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가 멈추지 않아 고생했다. 남인도는 덥다 보니 저마다 에어컨이 가능한 객실을 자랑하는데 때때로 너무 자랑하고 싶은지 성능이 매우 뛰어나다. 여기에 선풍기까지 계속 돌면 좁은 객실에서 한기를 피해 달아날 곳이 마땅치 않다. 그런데 이 선풍기가 멈출 생각을 안 하니 견디기 어려웠다. 그리고 문제의 티루바난다푸람의 숙소. 이곳은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찬물로 샤워를 한 것은 20여 년 전 군대가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10월부터 3월까지만 온수가 나왔었다. 5월부터 8월까지야 찬물로 어떻게 해보겠는데 4월과 9월은 정말 힘들었다. 엄청난 전방이 아니었음에도 군대는 왜 그리 추운지 환절기의 냉수 샤워는 지금도 좋은 기억이 아니다. 그런데 그 좋지 않은 기억을 이 먼 타국 땅에서 다시 겪게 된 것이다. 숙소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왼쪽 레버를 당기면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왼쪽 레버를 당기자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천장에 달린 샤워기에서는 끊임없이 찬물이 쏟아졌다.
그제야 나는 화장실 한편에 비치된 거대한 플라스틱 양동이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양동이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꼭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싶다면 나를 이용하라고. 추측건대 따뜻한 물과 찬 물을 양동이에 받아 휘저은 뒤 적당한 온도가 되면 양동이 주둥이에 걸려있는 바가지로 몸에 부어가며 샤워를 해야 되는 듯 보였다. 문제는 도통 그 양동이와 바가지로 씻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동이와 바가지의 이음새마다 검은 떼가 끼어있었다. 그 떼들은 물과 함께 내 몸으로 쏟아질 것 같았고 그러느니 차라리 깨끗한 찬물로 씻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시작된 선택적 냉수마찰은 옛날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이곳이 무더운 인도, 그것도 남인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군기가 빠질 대로 빠진 아저씨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물이 떨어지는 곳에 머리만 살짝 걸쳐놓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는 물이 하나도 묻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꿩이 숲에 머리만 숨긴 모습이 이 꼴일까. 결국 주춤주춤 물줄기 안으로 들어갔고 겨우 본격적인 샤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샤워 시간은 전에 없이 빨랐다.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사용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그래도 아들이 문제없이 씻었으니 다행이다. 요즘은 가끔 보면 나이 들어버린 나보다 혈기 넘치는 아들이 이 여행에 더 어울리는 듯하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섭섭한 한기 서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