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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Feb 10. 2023

포스트 에디팅을 아세요?

새로 보게 된 포스트 에디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역 의뢰하는 메일을 보면 간혹 '번역기를 절대 쓰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연히 안 쓸 것이지만, 의뢰하는 입장에서는 노파심에 하는 말이었다. 그만큼 번역기의 결과물이 별로란 말이기도 하다.


그래도 통대 다니면서 '포스트 에디팅(post editing)'에 대해 배우기도 했고 졸업 직후 프리랜서로 일하던 첫 해에 기계번역된 문장들을 고치는 일들이 꽤 있었다. 물론 난 개인적으로 단가도, 작업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 시도해 보고 관두었다. 문장이 너무 앞뒤 문맥이 없어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러다 보니 오히려 그냥 번역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렇게 이 포스트 에디팅이란 것을 한동안 잊으며 지냈는데 최근에  이 방식으로 번역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일단 '포스트 에디팅'이란, 말 그대로 번역기 돌린 것을 후편집을 하는 것이다. 보통 사용하는 번역 프로그램으로의 작업과는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다. 둘 다 초벌된 번역문을 가지고 역자가 편집하는 것이지만, 번역툴은 역자 자신이 툴을 사용하면서 쌓은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원문의 매칭 정도에 따라 결과물이 제시된다. 반면 포스트 에디팅은 번역툴뿐 아니라 흔히 쓰는 다양한 번역기를 돌려 그만큼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얻은 번역문을 편집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초벌 번역 후에 하는 '감수'와 포스트 에디팅은 어떻게 다른가? 엄연히 말하면 포스트 에디팅은 감수가 아니라 번역이다. 감수는 번역을 이미 마치고 수정하는 단계지만, 포스트 에디팅은 그 자체로 번역 작업이다.


나란 번역사는 변화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아날로그식 작업자라 처음에 번역툴도 잘 쓰지 않았다. 타자 치는 게 번거롭고 손목 아픈 일인건 사실이지만, 번역툴의 복잡한 UI부터 거부감이 있었고 뭔가 작업이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처음 시작할 때나 그렇고, 타의적으로 번역툴 사용이 강요되어 어쩔 수 없이 쓰다 보니 뒤로 갈수록 작업이 수월해졌다. 그만큼 데이터가 쌓일수록 작업 효율이 몇 배는 향상된다. 특히 게임 번역에서는.

포스트 에디팅도 사실  내가 먼저 나서서 해볼 일은 없었다. 어차피 번역 의뢰는 번역기 돌리지 말아 달라는(즉, 성의 없게 하지 말라는ㅋㅋ) 요청이 기본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에 이 포스트 에디팅 방식으로 작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예 번역기 돌린 번역본을 원문과 함께 전달받았다. 방대한 분량이고 시의성이 있는 내용이라 빠른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계번역된 결과물이 형편없으면 그냥 처음부터 내가 번역하는 것보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꺼렸는데, 결과물의 정확도가 70% 정도 된다며 자신감을 보이기에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기로 했다. 사실 이를 핑계로 단가도 조금 낮아져 하기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의뢰하는 입장에서는 그만큼 수고가 덜 들 것이니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눈에 보이는 단가가 낮아지니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어쨌든 분량도 많고 정확도 높다는 이야기를 믿으며 이번에는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번역본 완성도가 정말 꽤 높았다. 어떤 문장은 끝에 '습니다'체를 '이다'로만 바꾸면 되었고 아예 손대지 않아도 되는 문장도 많았다. 오히려 내가 배우기도 했다. '아, 이런 단어도 쓰지 참.'하고 나도 다음엔 다른 번역에서 이런 단어를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타자 칠 일이 줄어드니 피로도도 낮다.

그런데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점점 느끼게 되는 건, 넋 놓고 있다가 어느새 내가 원문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계번역된 문장이 술술 읽히고 문법이나 문맥상 오류가 없으니 나도 모르게 원문을 안 보고 번역문만 보며 고치고 있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 원문과 함께 봤다. 번역문만 읽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문장이 사실 원문과는 다른 뜻이었다. 오역이었던 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포스트 에디팅이란 방식을 무턱대고 불신할 필요도 없지만, 제대로 된 번역을 하려면 결국 번역하는 사람은 '나'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건 감수가 아니고 번역인 만큼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듯 수정하는 게 아니라, 타자만 안 칠 뿐 처음 하는 번역처럼 해야 한다.

포스트 에디팅이 번역사에게 약이 될까, 독이 될까는 전적으로 번역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시간을 절약하고 효율을 높이며 배우기도 하면 약이 되지만, 시간만 절약하고 정작 오역 많은 결과물을 낸다면 독이 된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업에서(아직 진행 중이지만) 느낀 건, 포스트 에디팅을 너무 꺼리지는 말자는 생각이다. 쓸 수 있으면 쓰되, 제대로 쓰자는 생각이다. 결국 그냥 하는 번역이든 포스트 에디팅이든 번역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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