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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Feb 26. 2024

그 거리의 여름

                               

얼마 전 친정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친구에게 모임 연락이 왔다. 노환이 있으셨지만 그래도 상을 치르는 일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 아마 이제 크고 작은 정리를 마쳤나 보구나 싶었다. 먼저 그 길을 지나온 사람으로서 떠올릴 수 있는 과정의 모습이 그려지고, 친구가 겪었을 마음의 시간이 이해되기도 했다.

스무 살 무렵의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다섯 명이 모인다. 서울과 수도권에 흩어져사는 지라 모임 장소를 잡을 때면 늘 합리적이고 공평한 동선을 고민하게 된다. 이번에는 사당역에서 모이기로 했다.     

 

사당역이라. 그곳에 가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서울 시내로 가기 위해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사당역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집 앞의 광역버스가 서울 시내 이곳저곳으로 훌쩍 데려다주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다. 버스노선도, 지하철 노선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다.     


네이버 지도에 사당역을 확대해서 물끄러미 봤다. 지금껏 내게 남은 사당역의 이미지는 인파와 전쟁이다. 그 오래전 사당역 앞에서 수원 오는 버스를 타려면 치르던 전쟁. 그나마 마지막 버스를 놓치면 무조건 머릿수대로 요금을 내고 타던 총알택시. 몇 번 타본 그 택시는 정말 총알처럼 빠르고 무서웠다. 

사실 내게는 그 총알택시만큼이나 무서웠던 것이 버스를 타려는 인파였다. 지금처럼 버스 번호 별로 안내판이 붙어있지도 않고, 사람들은 제대로 줄을 서지도 않았다. 버스가 오면 그나마 엉켜있던 줄이 우르르 무너졌다.

나는 늘 그런 것이 힘들었다. 운전을 그리 오래 했어도 여전히 비보호 좌회전이나 회전교차로처럼 신호 없이 눈치껏 끼어들어야 하는 도로에는 적응이 되지 않는 이가 나란 사람이다. 그러니 재빠르게 눈치싸움을 해야 탈 수 있었던 버스 대신 한참을 빙빙 돌아서 오더라도 1호선 국철이 차라리 편했다.   

  

그땐 그랬지…. 하며 지도를 보다 문득 오래전 여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었을까.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나는 그 인파 붐비는 사당역에서 수원으로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햇볕은 뜨겁고, 숨이 막힐 듯 더워서 나는 계속 징징댔다. 결국 우리는 버스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그 앞의 제과점에 들어가 빙수를 먹었는데, 그 오랜 시간을 지나왔어도 나는 아직 그날 그 빙수의 시원함이 선명하다. 빙수를 처음 먹은 것도 아니고, 그 집이 유달리 빙수로 유명한 집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팥빙수를 내놓았을 뿐인데도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그날의 빙수다.     


요즘 빙수는 눈꽃처럼 잘 녹지 않는 얼음을 쓰거나, 팥 대신에 온갖 과일이며 시럽을 뿌려 알록달록 이쁘게 내놓는 것이 유행이다. 어느 호텔의 망고 빙수가 유명하다는 말이 돌면 너나 할 것 없이 몇만 원을 훌쩍 넘어가는 ‘호텔망빙’ 인증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해마다 봄꽃은 빨리 피어난다. 더운 여름이 와도 도시의 사람들은 거리를 오래 걸을 일이 점점 적어진다. 잠깐 걷다가 어디든 실내로 들어가면 살 것 같다. 순식간에 여름은 시원해진다.      


이렇게 어디든 들어가면 에어컨이 시원해서일까. 언젠가부터 빙수가 예전만큼 시원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름이면 몇 번쯤 팥빙수 생각이 난다. 

그 비싸다는 호텔망빙을 먹을 엄두는 내지 않지만, 태양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는 더운 여름날이면 늘 사당역 앞에서 빙수를 한입 입에 넣었을 때의 그 시원함이 생각났다. 차갑고 달달한 얼음 부스러기가 더운 몸의 온도와 만나 미끄러지듯 목을 타고 넘어갈 때의 그 청량한 느낌.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듯한 시원함.    

  

사당역 앞에 가본지 오래이니 당연히 그 길의 풍경은 대부분 잊었다. 엄마와 언니, 우리가 함께 갔던 그 팥빙수집도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어쩌면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나를 지나쳐 과거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차창 밖 풍경이 나를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지나쳐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세월이 차창 밖으로 지나갔고, 이제 엄마는 떠나고 없다. 언니는 멀리 타국에 있으니 일 년에 한 번 보는 것이 고작이다. 나를 지나쳐간, 어쩌면 내가 두고 온 것들을 그리워한다. 그 여름은 여전히 거기 있을 텐데 다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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