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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Dec 23. 2023

오늘, 동지

                                 

“명원아!”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들린 것 같았다. 흘깃 옆을 봤다가 이내 혼자 생각했다.

‘엄마가 저렇게 나를 불렀지.’

부모님과 오래 한동네에 살았다. 어딘가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면 아빠이거나 엄마였다. 대부분은 둘이 함께였다.

그럴리 없지만, 엄마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돌아봤던 거기엔 죽집이 있었다. 죽집은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죽집 유리창에 커다란 동지팥죽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동지로구나, 오늘.     


친정에선 늘 얻어먹는게 일인 사람이 그래도 동지엔 팥죽을 사갔다. 세상 천지에 이렇게 맛 없는 걸  엄마는 왜그렇게 맛있게 드시는지 이해가 안가서 동지엔 팥죽이니 한 그릇 먹으라는 말에는 늘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나 맛있는데... 매번 엄마가 그랬다.     

얼마 후부터는 죽집에서 동지날이 아니어도 엄마 아빠 죽을 샀다. 두분이 함께 병들었으니 늘 환자가 먹을 죽이었다. 두분은 일년을 함께 앓다 이십여일을 사이에 두고 떠나온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두분이 떠난 봄을 지나 가을까지 담석증으로 종종 데굴데굴 구르며 뭘 먹어도 제대로 소화되질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팥죽은 그렇게나 맛이 있었다. 수술을 하고나선 더 이상 배를 잡고 굴러다니지 않았지만 여전히 팥죽이 맛있어서 동지가 아닌 날에도 종종 사먹었다. 아픈 엄마 아빠가 없는데도 종종 사다가 혼자 먹었다.      


얼마전까지는 기억했는데, 막상 날이 되어선 오늘이 동지인걸 잊고 있었다. 누군가, 꼭 엄마가 부르는것만 같은 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죽집의 포스터를 볼 일이 없었을테니 아마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오늘이 동지였네.

눈이 충혈되어 안과에 약을 받으러 가던 걸음을 돌려 죽집에서 팥죽을 한그릇 샀다. 죽집엔 사람이 꽉차있었다. 다들 팥죽을 먹고, 팥죽을 챙겨갔다. 집에 돌아와 안약을 옆에 놓고 팥죽을 덜어 먹었다. 남겨두었지만 아마도 식구들은 먹지 않을 것이다. 팥죽은 나만 맛있어한다. 얼마나 맛있는데... 나 역시 엄마처럼 말하며 혼자 먹는다.     


팥죽을 먹으며 사는 일을 생각한다. 아픈 부모의 보호자로 다니던 그 병원에 나 역시도 두 번이나 드러누워 수술을 받아봤고, 동지엔 팥죽이라며 권하는 엄마 말에 도리질을 치며 입을 꼭 닫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그 팥죽이 맛있다. 아마도 시간이 더 흐르면 언젠가 딸이 내게 팥죽을 사오고, 나는 여전히 엄마처럼 말할지 모르겠다. 얼마나 맛있는데...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늙은 내가 떠나고 없는 어느 날엔 우리 딸도 나처럼 팥죽이 맛있어질까.

동지날엔 그래도 팥죽을 먹어야 하는데 아이가 잊고 있는 것 같으면, 어느 죽집 앞을 지날즈음 나 역시 다급하게 딸을 불러보게 될까.

딸에게 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더라도 팥죽 한그릇 사들고 가는 그 뒷모습을 보면 나 역시도 흐뭇해하게 될까.


나는 팥죽한그릇을 맛있게 먹고 수저를 내려놓고 혼잣말처럼 인사한다.

 엄마, 맛있게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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