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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Dec 18. 2023

눈 오는 날

                       

눈이 오는 날이면 추워도 좋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늘에서 눈이 폴폴 내리면 탄성이 먼저 나오고, 그 눈이 소복이 쌓이면 눈 장난을 한다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털장갑이 젖고, 젖은 눈에 손이 온통 빨갛게 얼어버려도 눈 장난을 멈추지 못했다. 

일어나 거실로 나오니 창밖에 뽀얗게 안개로 덮인듯했다. 눈이었다. 아! 잠깐 탄성을 지르며 눈 풍경을 봤다. 올해 첫눈은 아니지만, 이토록 소담스럽게 날리는 눈은 처음이니 잠시 마음을 뺏겨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미 눈은 도로를 덮고, 인도에 쌓이고, 지붕 위에 가득했다. 온 세상이 안개로 가득한 듯 날리는 눈발을 넋 놓고 보다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오늘의 약속. 그리고 신청해둔 강좌.     


넓은 인간관계를 맺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보니 대부분 보는 이들을 보고, 오래 알아 온 사람을 계속 알고 지낸다. 그렇지만 어느 글에선가, 인간관계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어떠한 관계는, 마치 유통기한을 두지 않는 씨 간장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백 년 넘게 이어왔다는 씨 간장 역시 그 세월 동안 원형 그대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씨 간장에 간장을 더하고, 그 간장은 다시 씨 간장이 되며 오랜 시간을 이어져 온 것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오랜 인간관계란 이런 씨 간장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씨 간장이 또 다른 씨 간장이 되는 일. 인간관계가 오랜 인간관계가 되려면 이처럼 기본에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이렇듯 관계를 맺는 일에 신중하다 보니 넓지 않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데 당연히 그들과의 약속엔 신중하다. 게다가 일이든, 여흥이든 약속이란 것에 무게감을 느끼는 사람인지라 펄펄 내리는 눈앞에서 망설였다.

아마도 나사를 박은 다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눈이 내린다고 해서 크게 망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길이 미끄러우면 조심하면 되지, 눈이 많이 오면 차를 두고 택시를 타야지. 날씨 때문에 택시가 잘 오지 않는다면, 그럼 버스를 타면 되지. 이랬을 것이다.

하지만 내 다리에는 나사가 박혀있고 와이어가 감겨있다. 앉아 있을 때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것은 내가 걷고, 계단을 오르내릴 땐 강력한 아우라를 발산했다. 그렇지. 내 다리에 나사 몇 개랑 와이어가 감겨있지. 이러다 나사 박힌 채로 또 넘어지기라도 하면 분쇄골절이라고 했지. 움직일 때마다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의 날들 동안 나는 잘 걷고, 돌아다녔다. 처음엔 비가 오는 날엔 집밖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비가 오는 날도 우산을 받쳐 들고 조심해서 동네를 걷는 용기쯤은 낼 수 있다. 다치고 나서 멈췄던 산책도 다시 시작했으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낯선 곳에선 하루 이만 보도 씩씩하게 걸었다. 하지만 가끔은 무릎이 따끔따끔해서 의사가 조심하라고 했던 수술 후 외상성 관절염이라는 낯선 의학용어가 생각났다. 템플스테이를 가자는 말에 호기롭게 함께 하자고 외쳤다가 이내 108배는커녕 양반다리도 쉽지 않은 내 다리를 생각하고 맘을 접기도 했다.     


눈이 펄펄 내려서 쌓이는 거리를 내려다봤다. 9층 내 집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멋있고, 그대로 한 장의 캘린더그림같다.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이렇듯 평온한데, 그 풍경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한번 정한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지인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갑자기 일이 생겼어요, 같은 핑계는 대지 않는다. 눈이 많이 와서, 겁이 나서 집 밖으로 나설 용기가 없다고 솔직히 이야기한다. 나를 알고, 나의 다리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니 아마도 그들은 이해해줄 것이라 믿고 그제야 조금 편해진 맘으로 창밖을 오래 보았다.      


눈은 점심 무렵까지 계속 내렸다. 다른 걱정 없이 내리는 눈에 환호하던 어린 시절은 지나갔다. 언제인가부터 다음날 눈 예보가 있으면 먼저 운전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이제 어른이 된 걸까. 하지만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잠깐,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눈이 온다고 소리치며,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꽁꽁 얼어버린 길에서 발썰매를 타면서도 신이 나던 그 시절로. 

지나갔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그 시절이 나를 스쳐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그간 내 속에 계속 존재해왔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며 잠깐 아련한 기분이 드는 이런 순간은 내 속 어디엔가 씨 간장처럼 존재하며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앞으로 오래 이어질 씨 간장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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