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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n 08. 2024

애주가의 독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 정지아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좋은 문장, 멋진 표현을 찾아내는 재미를 즐기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은 접어뒀다. 좋은 문장, 멋진 표현 같은 건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었달까.

예전의 독서라면 ‘이야기’를 읽는 것이 다였다. 언젠가부터 내게 독서는 이처럼 좋은 문장을 채집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기도 하고, 색다른 편집을 보면서 배우기도 하는 시간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흘러가는 줄기를 찾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제목처럼 이 책은 ‘술’에 관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 그러니까 몇십 년 전의 기억들이 술과 함께 소환되어 생생하게 채워져 있다. 물론 술이라고 하면 늘 따라붙기 마련인 ‘주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물론 없진 않지만) 아니다. 오히려 술에 관한 사유의 이야기라고 하면 맞을까. 술은 훌륭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그 덕에 작가의 술 이야기는 내게도 저 밑바닥에 있던 기억을 꺼내어 혼자 씨익, 웃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술이라면 요즘은 한두 잔에 만족하는 편이지만, 한때 '먼동팀'이라고 불리던 친구들이 있었다. 몇이 모여 술을 마시다 밖으로 나와보니 먼동이 트고 있었던 그날 이후 생긴 이름이었다. 수원에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 다시 모이기 시작한 건 우리들이 서른셋이던 때부터였다. 마침 33회 졸업생이었던 우리는 같은 숫자에 꽤 의미를 부여하며 종종 모였는데, 모임이 대부분 그렇듯 함께 술을 마셨고, 많이 웃었다.      


버스는 이미 끊겼고, 택시 할증요금까지 내느니 아예 조금 더 마시고 다시 버스가 움직이면 그때 타고 가자. 이런 말 같지 않은 핑계로 먼동이 터올 때까지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었다. 그때의 먼동팀중에선 여전히 토요일 아침이면 빨간 뚜껑 소주와 막걸리 두어 병을 순댓국 한 그릇과 함께 깔끔하게 비우는 낙을 즐기는 친구도 있고, 언젠가부터 밤술은 하지 않고 낮술만 즐기는 친구도 있다. 소식이 끊긴 친구도 있고,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대충 전해 듣지만 그저 잘살고 있으려니 하는 친구도 있다. 또 어떤 친구는 선거철만 되면 "작가님!"으로 시작하는 홍보성 폭탄 문자를 투척하기도 한다.     


아빠는 소주를 소주잔에 따라 드시지 않은 사람이었다. 소주도 맥주잔에 따라 원샷하는 호기를 부렸다. 다만 늘 초저녁에 술자리를 시작해서 자정 넘기 전 귀가했다. 집에선 술이라면 반주 한잔도 하지 않으셨고, 술친구들을 끌고 들어와 술상을 차리라는 법도 없었다. 아마도 아빠는 술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즐거웠던 게 아닐까.

나는 사실 아빠에게 받은 유전자 덕인지 술에 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회식처럼 다수가 모이는 시끌벅적한 술자리보다는 편한 몇이 모이는 담담한 술자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술자리보다 사실 술맛에 관한 호기심이 더 많다.      


하지만 몇 해 전 담석증으로 담낭제거 수술을 하고 나선 술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사람이 담낭을 떼어내고도 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소화효소인 담즙을 모아뒀다가 조금씩 꺼내쓰는 통장 역할을 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통장이 사라졌으니 이제 저축은 물 건너가고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신세가 된 것이다. 기름기 있는 음식이나 매운 것을 먹고 나면 화장실 가는 주기가 빨라졌고, 당연히 술도 그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에는 자빠져서 금 간 무릎뼈를 핀으로 고정하는 수술을 했다. 천천히 걸으면 남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정도가 되는 데엔 반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일 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무릎엔 핀이 박혀있고, 뛰거나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는 건 하지 못한다. 그러니 혹여라도 술을 마시고 비틀대다 넘어질까 봐 새가슴이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술을 멀리했다.    

 

타고난 유전자 덕에 술에 빨리 취하지 않지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제 '맛있는 술'을 찾는 사람이 되었다. 내 입에 맛있는 술을 딱 한두 잔 마시는 거로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이다. 막걸리라면 느린 마을, 사케라면 유자사케, 전통주라면 매실이나 복분자주, 그리고 맥주라면 나는 밀맥주를 사랑한다. 이런 것들은 여전히 내 입에 맛있다. 


소주라면 두 병을 마시고 집에 멀쩡히 잘 돌아오던 사람이 나였다. 하지만 이제 한두 잔으로도 충분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나의 술사랑이 덜해진 건 아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꼭 양에 비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나는 여전한 애주가이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 또한 독서의 멋진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책장을 덮으며 냉장고 깊숙이 넣어둔 구례의 머루와인을 떠올렸다.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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