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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04. 2024

추모

                                 추모(追慕)         

 

추모란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에는 실체가 없다. 하지만 가끔 봉안당이나 국립현충원 등의 묘지에 가면 그 마음의 물성을 만나기도 한다. 색이 바래지 않은 조화 다발, 작은 십자가나 불상, 그리고 떠난 이와 함께 나눈 순간이 담긴 사진들. 먼저 떠난 이를 생각하며 거기에 담아 둔 마음을 보는 것이다.     

오늘은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기일이었다. 매해 명절과 기일이면 찾는 봉안당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즈음 시댁 식구들이 말했다. 아버지가 수목장을 원했는데, 막상 돌아가실 때가 되니 주변에서 자식들 찾아오기 쉽게 가까운 시립봉안당이 낫다고 말해주어 마음을 바꾸셨다고. 사실 가깝다고 자주 가고, 멀어서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은 돌아가 누울 내 자리를 정하는 일에서조차 오가는 자식의 편의가 먼저였던 걸까 싶었다. 

6월이 끝나는 날이었고, 장마의 시작이었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젖은 고속도로를 달리며 문득 그날을 생각했다.     


봉안당은 양쪽으로 구획된 방마다 바닥부터 천정까지 납골함들이 들어차 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남편은 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네모난 납골함의 유리문에 맞춘 조그마한 생화 코사지를 꽂으며, 남편은 아버지의 사진을 유심히 보고, 습관처럼 납골함의 날짜를 유심히 세어본다. 우리 아부지 떠나신 지 벌써 몇 년이 되었네, 하는 식이다. 떠난 이의 시간은 납골함 속 숫자로 멈추어있는데, 남은 이들의 시간은 이렇게 어김없이 흘러간다.      


선 채로 두런두런 떠난 아버님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 칸엔 ‘USA NAVY’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제복을 입고 환하고 웃는 젊은이의 사진이 있다. 아마도 떠난 이의 손자는 미국 해군이 된 모양이다. 살아서 그 모습을 보셨더라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싶을 정도로 늠름한 모습이었다. 아래 칸엔 행복한 눈 맞춤을 하고 있는 커플의 웨딩화보와 함께 청첩장이 붙어있었다. 청첩장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신랑 아버지의 이름이 없다. 떠난 이는 저 행복해 보이는 신혼부부의 아버지인 걸까. 떠난 아버지의 납골함에 청첩장을 붙이는 아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선 인디언의 이야기가 나왔다. 보통은 사람의 숨이 멎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지만, 인디언들은 죽은 이를 더는 기억하는 이가 없을 때야 비로소 진짜 죽은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제는 제목도, 스토리도 잊은 그 책에서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그 부분이었다.

납골당안의 수많은 죽음을 본다. 기억하고픈 젊은 시절의 웃음, 떠난 이후 태어난 새 생명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우리는 잘 살고 있어요’ 라며 전하는 새로운 소식들, 그리고 하고픈 백 마디의 말 대신 유리문에 가득 붙여둔 색색의 코사지들. 유골함에 새겨진 떠난 이들의 멈춘 시간 이후에도 이어지는 ‘추모의 마음’들이 그곳에 있다.      


나오려는데 그제야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군데군데 몇몇 납골함에는 그 어떤 코사지도, 사진도 없이 그저 덩그러니 유골함뿐이었다. 한 개의 코사지는 늘 꽂아둘 수 있게 유리문에는 고리도 설치되어 있지만, 그곳조차 비어있는 모습이 어쩐지 쓸쓸했다. 

친정 부모님이 계신 대전 국립현충원도 역시 그렇다. 시아버님이 계신 봉안당을 찾듯 친정 식구들이 머무는 그곳도 명절이며 기일엔 꼭 찾는데 야외에서 눈비와 바람, 그리고 뜨거운 태양에 늘 노출되어 있는 조화 다발은 갈 때마다 새것으로 하나씩 바꿔둔다. 주변을 둘러보면 선명한 색감으로 눈에 띄는 것이 있는 반면, 다녀간 지 오래인 듯 바래고 낡은 조화 다발도 간혹 보여 괜스레 마음이 쓰이곤 했었다.     


멀리 사는 가족도 많고, 형제자매도 점차 예전 같지 않은 시대이다. 핸드폰이 있고, 언제든 동영상으로 목소리와 웃음을 나눌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이 예전보다 사람들을 더 가깝게 연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 빨리 잊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디언의 죽음을 가끔 생각한다. 더는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사람은 진짜 죽는 것이라는 그 말.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백세시대를 살지만, 사실은 예전보다도 더 단명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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