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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May 01. 2024

시간의 무늬

                                    

내가 어렸던 시절의 수원은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세류동은 수원에서도 오래된 동네 축에 든다. 토박이로 수원에 계속 살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사람들을 모을만한 시설이 없고, 우리 집에서 지하철 노선이 한 번에 연결되는 것도 아닌 그 세류동에 가는 일은 사실 거의 없다.     


오랜만에 그 세류동으로 발걸음을 하게 된 건 수원 전투비행단에서 열리는 에어쇼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많이 몰릴 테니 차는 두고, 지하철을 탔다. 시내버스도, 지하철도 세류역에 가려면 갈아타야 하니 차라리 매교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내심 어려서 살던 동네를 좀 더 가까이 보고, 또 혹시나 옛집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매교역에서 비행장을 향해 걸었다. 어릴 땐 주로 관사에서 살았지만, 아빠가 타지 근무를 하는 동안은 관사에서 나와 근처 주택에서 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세류삼거리 근방이었는데 이제 사방으로 도로가 뚫린 세월이므로 그 명칭조차 없어지고 세류사거리가 되었다. 어렸을 때 살던 그 집이 그대로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걷는 내내 내 눈은 열심히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그 집을 찾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살던 그 옛집. 그 집은 부모님이 처음 지은 집이었고, 내가 마당에 대한 로망을 여태 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집이다. 할머니가 닭과 토끼를 길렀고, 마당에 앵두나무가 있던 우리의 ‘세류동 집’은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세월이 오십 년 가까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서운한 마음에 건물 뒤편까지 들여다봤다. 

그러다 보면 간혹 앞의 건물 바로 뒤에 붙은 아주 오래된 주택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 기억 속 그 옛집의 구조와는 다르니 우리 집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애틋한 눈으로 한동안 바라봤다. 집의 외관을 보아서는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집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에 함께 이웃하던 집이었겠지 싶은 마음에 선뜻 발걸음을 돌리기 어려웠다.     


결국 옛집은 찾을 수 없었지만, 에어쇼를 보는 내내 이제 하늘의 영원한 보라매가 된 아빠를 추억하며 돌아오는 길엔 또 다른 추억 자리를 찾아갔다. 그 시절 우리가 살던 관사엔 쓰지 않는 2층 초소가 있었다. 친구와 늘 그 초소에 올라가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더운 날에도 서늘했고, 비가 오는 날에도 놀이터가 아쉽지 않던 우리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가서 두부 사 오너라”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가 말씀하시면 우리는 바구니에 돈을 넣고 그 초소로 올라갔다. 

“아줌마! 두부 주세요!”

네모난 창에 머리를 내민 채 줄을 달아 바구니를 내리면 관사 건너편 가게 아주머니가 그 안에 두부를 담아 올려주시곤 했었다.      


가끔 생각한다. 그 아이디어는 우리 가족 중 누구 머리에서 나왔던 걸까. 

탑에 갇힌 라푼젤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풍경이 나오는 동화를 읽을 때, 혹은 잭이 콩나무를 타고 높이 높이 올라가는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 초소를 생각했다. 그때마다 너저분한 자재가 쌓여있고, 비 올 때면 습한 냄새도 나곤 하던 그 버려진 초소는 아름다운 공주가 사는 탑이 되고,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콩나무가 되기도 했다.      


이제 그 관사는 일반 아파트가 되었다. 그런데 그 초소가 있던 귀퉁이 바로 앞에 작고 이쁜 독립서점 ‘책 먹는 돼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오래전의 기억이지만 바구니에 두부를 넣어주던 작은 가게 언저리다.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언저리에 있는 나에게 의미 있는 추억의 장소인데, 심지어 그곳에 서점이라니 싶어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근방에 도착했을 때, 굳이 서점의 간판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서점은 마치 동화 속의 집처럼 온통 푸른 담쟁이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은 그림이었다.     


책을 고르다 서점 지기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젊은 아가씨일 거라고 막연한 짐작을 했던 내 예상과 달리 은발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분이었는데, 어쩐지 마주 앉으면 얼굴이 닿을 듯 작은 그 공간에 참 잘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더 신기한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그 동네에 얽힌 나의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은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님이셨던 것이다. 그저 책방지기와 손님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는데, 거기에 동문이라는 인연이 얹히니 이야기는 더욱 즐거웠다.      


세상은 이렇게나 좁고, 때로는 막막할 만큼 넓다. 아는 이라곤 하나 없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엔 모르는 이들과도 이처럼 선뜻 추억이 연결된다. 이런 게 사는 일인 걸까.

지난 나의 옛 추억이 한 가닥의 실이라면, 때로는 몰랐던 이들과 저마다의 추억이 연결고리로 엮이며 여러 가닥의 실이 되기도 한다. 한 가닥이든 여러 가닥이든 그 실들이 엮이고 엮여 근사한 무늬를 만들어 내는 삶을 생각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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