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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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이널 판타지’라는 게임의 오랜 유저이다. 무언가에 빠지면 불태우긴 해도, 물불 못가릴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 역시도 게임에 푹 빠졌던 시기가 없진 않았다.
“저녁은 조금 이따가 먹어. 이 전투부터 끝내야 하니 기다려!”
이렇게 말할때면 남편은 웃었다. 슬쩍 뒤에 와서 대체 나이먹은 여자가 뭘 한다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쉴새없이 눌러대며, 심지어 육성으로 감탄사와 한탄을 번갈아 내뱉어가며 몰두하는가 보기도 했다.
“아이구, 정신없어. 나는 하라고 해도 못하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실로 나간 남편은 저녁을 줄때까지 얌전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기다리곤 했었다.
파이널 판타지를 처음 시작하게 된건 딸 덕분(?)이었다. 먼저 게임을 시작했고, 지나치게 빠진 결과 가족회의를 거쳐 살벌한 각서를 쓰기까지 이르렀다. 지나고 보니 그 일은 약이 되어서 마무리는 훈훈했으나 그 과정이 평탄했을리는 없다.
비록 길지는 않았다지만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나니 딸은 적절히 조절하며 게임을 즐기는 유저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대체 무엇이길래’라는 마음 반, ‘그것이 뭔지 알아둬야’ 대처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반으로 슬쩍 게임에 입문했다.
게임은 자기 혼자 하는 것 같아도 혼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혼자도 가능하지만, ‘부대’라는 일종의 공동체에 가입하면 정보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경험치도 훨씬 빨리 올라갔다. 딸이 가입되어 있는 “호!”라는 이름의 부대에 나를 끼워줬다. 부대원은 총 여덟명이었는데 몇 년동안 함께 부대원으로 지냈어도 얼굴을 본적도 없이 유지된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렇다. 오랜 세월 낚시를 했지만 인터넷 상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낚시꾼들 대부분을 알지 못한다. 요즘의 취미생활이란 예전과 이렇게나 다르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었다. 간호대학생도 있었고, 웹소설 작가도 있었다. 취준생도 있고, 직장인도 있었다. 딸이 출근한 사이 게임에 접속하면 먼저 들어와있던 그들은 내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다가와 인사해주었다. 초보인 나를 위해 캐릭터의 옷을 갈아입히고, 유용한 아이템을 장착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넓은 대륙 여러개로 이루어진 게임 속 세상에서 어느 지역에 가면 지금 초보유저를 위한 이벤트를 한다든가 하는 정보도 전해주었다. 은근슬쩍 다가와서 꽃이나 음식 아이템을 주고 가기도 하며, 심지어 게임머니를 두고 가기도 했다. 게임으로 이끈 건 딸이지만, 막상 나를 가르친건 ‘호!’의 부대원들이었다.
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제 ‘호!’는 유명무실해졌다. 부대원 명단속의 그들은 대부분 최종접속시기가 몇 달에서 몇 년전이다. 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가장 자주 접속하는건 그나마 며칠에 한번 들어가보는 나뿐인 것 같다.
이렇게 며칠에 한번 드나들지만 꾸준하게 해온 덕에 나는 이제 초보시절을 벗어나 만렙을 찍은 유저가 되었다. 궁술사로 시작했던 나의 직업도 여러번 바꿔본 결과 내게 가장 맞는 무기인 총을 쓰는 기공사로 정착했다. 직업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임이므로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원예가로 산다. 채집해온 씨앗을 밭에 심고 가꾸어 장터에 내다팔기도 한다. 예전에 나를 “어머니!”라 고 다정하게 부르며 꽃이나, 게임머니를 주고 가던 부대원들을 가끔 생각한다. 이제쯤엔 나도 그들에게 꽃선물을 하고, 아이템을 나눠줄 수도 있는데...하면서.
게임세상에선 전투를 하거나 아이템을 모으는 것 뿐 아니라 집도 가질 수 있다. 맘에 드는 땅을 입찰하고, 직접 주택을 짓고 꾸민다. 나 역시도 작은 개인주택을 가지고 있다. 내 집이 있어도 나는 가끔 우리 부대공동의 집에 가보곤 한다. 한참 ‘호!’의 부대원들이 거의 매일 게임에 접속하던 시절엔 부대공동주택의 우편함에서 서로 아이템을 주고 받거나, 안부를 묻는 짧은 쪽지를 놓고 가기도 했다.
‘어머니, 다음주에 이벤트 한대요. 성공하면 희귀아이템을 줘요.’
‘어머니, 퀘스트 달성 못하신 것 있으면 도와드릴게요.’
‘우리 엄마한테 어머니 이야기했더니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아요!’
그때만난 부대원들이 특별한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교감’.
그들은 게임세상속 어디에서나 만나는 NPC가 아니었다. NPC란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전투를 할 때 물리쳐야 적군이기도 하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떠한 퀘스트를 수행하게 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 어떤 것이든 NPC와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호!’의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게임세상속 존재이지만, 동시에 부대원들과 다른 진짜 게임속 아이템이니까.
나는 지금도 이삼일에 한번, 어떨때는 매일 게임에 접속한다. 길게는 하지 않으므로 그저 짧은 시간동안 잠시 머무르며 작물에 물을 주거나, 수확한다. 내 주택 마당의 조경을 괜히 한번 바꾸어 보기도 한다. 나는 이미 만렙의 유저이므로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퀘스트를 가끔 한다. 그리고는 ‘날아다니는 탈것’을 타고 다른 대륙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본다. 오래전 초보유저이던 시절엔 그 ‘탈 것’이 없었으므로 다른 부대원들이 날아다니는 자동차나 용, 혹은 날개달린 당나귀등에 태워주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얼굴을 모르며, 본명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굳이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건 ‘해요’님이며, ‘암브로시아’님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한 ‘호!’의 나날들이 꽤 정겨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게임에 접속할때마다 ‘호!’의 부대원들이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왜 요새 뜸하셨어요!” 같은 다정한 인사를 건네던 순간이 그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