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메리 대성당의 미사 시간은 엄숙했다. 성당 건물로는 익숙한 모습인 고딕 양식의 이 성당은 1868년에 짓기 시작해서 2000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이미 관광지가 된 성당이긴 하지만, 지금도 매일 미사가 열리는 성당이다. 그렇기에 그 미사 시간만큼은 사진을 찍을 수 없고, 소란하게 할 수 없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직원이 계속 관광객들을 통제했다.
우리의 평일 미사와 같은 듯 다른 점은 성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고, 미사 시간 중 신부님 곁에 복사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 봉독은 있었으나 따로 신부님의 강론 시간은 없는 듯했다. 물론 평일 미사기에 우리처럼 헌금은 하지 않았다. 성가도, 신부님 강론도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끝난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낯선 나라의 대성당에서 미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 본 건 처음이어서 나에겐 무언가 색다른 엄숙함으로 채워지는 기분이 드는 시간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작은 초에 불을 켰다. 현금을 쓸 일이 없는 시드니에서 처음 2달러 동전을 냈다. 초에 불을 켜고, 잠깐 기도했다. 나의 기도는 매일 같다. 멀리 떠난, 멀리 있는, 그리고 여기 있는 가족 모두를 위한 기도이다. 그렇게 잠깐 기도하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이 내게로 오는 기분이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기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늘 같은 기도를 매일 한다.
세인트 메리 대성당에서 나와 근처의 안작메모리얼로 향했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던 자국의 군인들을 기리는 곳이었다. 호주 본토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을 테니 지금의 사람들은 전쟁을 어떻게 생각할까.
휴전의 나라에서 온 나 역시 전쟁을 체험해 본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게 다가오는 전쟁은, 그처럼 부모님의 이야기 속 전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나의 다음 세대는 어떨까. 그마저도 전해 받을 이야기가 없는 세대가 그들이다. 이처럼 전쟁은 모두에게 다르다. 누구에겐 악몽으로, 누구에겐 아픔으로, 또 누구에겐 그저 실감할 수 없는 이야기로 온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선 전쟁이 현실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안작 메모리얼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안작 메모리얼의 이곳저곳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타지마할이나 워싱턴의 링컨센터와도 비슷하게 기념관 앞의 넓고 잔잔하게 채워진 물을 바라봤다. 그 아래에 참전국에서 가져온 흙이 보관된 공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진으로도 본 기억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는데 그곳이 아래인 줄 몰랐던지라 결국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고서야 그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날짜와 문구가 선명한, 내 나라의 흙이 담긴 작은 칸을 한동안 물끄러미 봤다. 그걸 보는 내게 안내원이 다가와 물었다. 한국인이냐는 말에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내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짧은 영어로 그와의 대화를 더 이어가기란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와 인사하고 돌아서며 혼자 생각했다. 사실은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내가 처음 안작 메모리얼로 들어올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서게 되었다.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시드니는 공원이 많고, 공원의 나무는 거대했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누워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여행을 오면 유독 그리운 것이 많아지지만 그중 사람이 제일 크다.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다. 살다 보면 아무리 그리워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을 떠올린다.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해 주는 인생을 살아야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