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를 꿈꾸던 아이가 가족 반대에 무릅쓰다가 죽은 자의 세상으로 가게 되나, 조상의 축복 속에 되돌아오는 이야기가 있다.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냐 말하겠지만 이래 봬도 가족용 애니메이션이다(제목은 <코코>다). 이 공상 만화 같은 이야기는 대가족 중심의 멕시코 전통 문화 속에서 나왔다. 그들에게 조상을 섬기는 건 친숙하고 일상적인 모양이다. 거기서 파생되는 서사는 다채롭고 유쾌하다. 이를테면, 일 년에 한 번 저승과 이승이 만나는 길이 열리고, 고인이 된 가수의 기타를 만지다가 그곳을 통과하게 되며,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가진 죽은 자의 세상을 만난다. 엄숙하고 무거운 우리의 제사와 상당히 다른 차이다. 어느덧 우리에게는 점점 사라지는 전통이 돼버렸다. 부모 세대는 음식 가짓수를 간소화하거나 추도식으로 바꾸고, 그걸 자식 세대로 넘길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또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까도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미 누군가에게는 맥이 끊긴 일이기도 하다. 문뜩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가 과연 어린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조부모나 그 윗대의 어른들과 함께 한 추억이 있다면 몰라도.
내 머리 속은 자연스레 어린 시절로 흘러간다. 우리도 ‘미겔’처럼 대가족이었다. 아버지가 장남이자 외아들이었으니까, 또 그 시절엔 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으니까, 함께 사는 걸 한 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엄마가 연년생인 여동생을 낳은 탓에 할머니는 초등학교 전까지 나를 도맡았다. 그녀는 꼼꼼하거나 수더분하지 않았어도 정이 많은 분이었다. 돈이 생기면 늘 맛난 간식거리를 엄마 몰래 챙겨주곤 했다. 그들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아 자주 다퉜다. 그렇다고 그녀가 분풀이로 우리를 몰아세우거나 다그치지는 않았다. 단지 떠오르는 건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조용히 담배 한 개비를 태우던 모습이다. 엄마가 날 잡아서 그곳을 청소하다가 담배꽁초를 발견하고 잔소리를 해도 모른 척했다. 엄마의 기억 속에 소환되는 그녀는 악다구니를 쓰고 남 헐뜯는 버릇이 있었다는데,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몸집이나 힘이나 입심이나 마음가짐으로 봐도 약하고 소극적이었다. 아들 내외가 잘 지내길 누구보다 바란 마음에서 꾹 참고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단지 엄마 입장에서는 시어머니라는 불편함과 끝이 보이지 않는 시집살이의 부담감이 컸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집안 내 입지가 엄마 쪽으로 기울자, 그동안 당했고 쌓였던 마음을 조심스러우면서도 한스럽게 털어놓았다. 이해한다. 엄마도, 할머니도. 내가 전자가 되어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팔이 안으로 굽어 대체로 전자의 편이었지만, 가끔은 후자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녀를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핑 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추억은 아련하나 또렷하다. 내 머리 속의 전래 동화 대부분은 그녀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둘째 고모의 자취방으로 가던 길에 내가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가 아끼던 은시계를 잊어버린 걸 내내 원망 들었던 것이나, 머리를 풀고 나가면 조용히 다가와서 얘 너는 꼭 붙들어 매는 게 예뻐라고 해주셨다. 그러나, 돌아가시기 전 기억은 별로 없다. 그녀는 마지막 일 년을 고모네 집과 요양원에서 전전긍긍했다. 늘 코에 긴 호스를 넣고 죽은 듯이 누워서 가파르게 숨을 몰아 쉬었다. 살짝 눈을 떴다고 해도 우리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 알지 할머니라고 해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왜 이렇게 잠만 자냐고 물어보면 막 식사하고 잠들었다고 했다. 아마 약에 수면제나 안정제가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를 요양원에 보낸 건 피치 못할 사정이었다. 어려운 자금 사정에 시달린 부모님, 일선에 뛰어 먹고살기 바쁜 고모와 고모부들, 누구도 그녀를 건사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경미한 인지 장애 낌새가 보였고, 젊은 시절 산후조리를 잘못한 탓에 부실했던 체력이 노환으로 와서 해마다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돌봤지만, 배려한 만큼 서운함도 쌓여갔다. 나와 동생들도 막 가정을 이루고 한창 바쁜 직장 탓에 무조건 어른들의 일로 여겼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보내자 합의를 봤다. 그녀는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상태로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그녀의 병을 더 키웠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 삶의 의지를 놓지 않으셨을까? 죽음을 향해 내딛는 모습에 좀 더 버텨라 했던 내가 모순적인 것 같았다. 만약 누군가 곁에서 좀 더 지키고 보살폈더라면 그 걸음을 좀 더 늦췄을 텐데.
힘겨운 숨으로 꿈꾸듯 저승 길로 떠난 할머니. 그녀도 ‘미겔’의 조상들이 살고 있는 죽은 자의 땅에서 평화롭게 쉬고 계실까? 얼마 전, 엄마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할머니 기일이었는데, 너도 기억 못 했지? 그래, 고모들도, 우리 누구도 몰랐어.” 떠들썩하게 지냈던 첫 기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잊혀진 존재가 되어간다. 영화 속에서 ‘헥터’는 그걸 두려워했다. 그는 ‘미겔’에게 자신의 사진을 이승으로 가져달라고 부탁한다. 딸이 그것을 간직할 수 있게. 그건 누구도 갖고 있지 않으며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이승으로 열리는 문을 통과할 수 없다. 누군가 조상의 사진을 간직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더 이상 축복받지 못한다. 모두에게 잊혀지면 한 줌의 먼지처럼 사라진다. 사후 세계에서 추방된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공기 중의 수증기처럼 흩뿌려지는지 아니면 머나먼 우주 밖으로 튕겨져 먼지의 결정체인 유성으로 이름 모를 별이 될는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고 혹은 누군가의 실수로 영영 잊어버렸다면, 얼마나 야속한 일인가. 남겨진 이는 모른다. 잊혀진다는 절망과 무(無)라는 소멸을.
사라지지 않으려는 ‘헥터’의 간절한 소망이 단순한 연민에서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왜 그의 가족은 간직하지 못했을까? 아니지, 그들을 탓할 게 못된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왜 할머니의 기일을 잊었던가? 왜 종종 그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녀의 죽음에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다. 그건 누구의 잘못이 아닌 가족 모두의 책임이다. 내색하지 않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명절마다 가족 모임도 흐지부지 돼버렸다. 엄마는 당신의 형편 탓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심점을 잃은 것이다. 그동안 가족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건 할머니란 존재감이었다. 그녀가 없으니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도 자연스레 나왔다. 게다가, 부모님, 고모나 고모부들이 예전 같지 않다. 하나, 둘 아프고 쇠약해졌다. 힘들고 지쳤을 뿐만 아니라 무기력해졌다. 모든 건 쉬쉬하면서 언급조차 회피했던 속내와 연관됐다. 자책과 상황 탓 말고도, 그녀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을 떠올리기가 힘들었을지 모른다. 송구하고 애석해서. 그렇다고, 다들 너무 했다. 미안해도 기억해야 했다. 그녀가 우리를 낳고 보살펴서 이만큼 잘 살고 있다고. 일찍 할아버지를 보내고 혼자서 아들과 딸을 건사했던 당신의 노고와 희생과 은덕을 알고 있었다고. 무뚝뚝하고 앞가림하기 바빴던 누구도 표현하지 못했다고.
봇물 터지는 추억들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든 게 불만족스러웠고 편치 못했다. 이 참회가 그동안의 과오를 씻고 이제부터라도 당신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면 믿어주겠냐고 말하고 싶었다. 잔소리도 하고 대들었던 큰 손녀는 당신을 속상함보다 애틋함으로 추억하고 있다고. 당신이 베풀었던 그걸 내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쏟는다고. 나는 끊임없이 회상했고 그리웠다.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그게 머리 속에 남아 지칠 때마다 쉼터처럼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원천, 내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옳다고 믿어줄 존재. 무서웠지만 친구 같았던 엄마와는 다른 의미였던,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었던 할머니. 그러나, 눈물은 점점 이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에 대한 반성은 또한 양가감정으로 귀결된다. 할머니처럼, 나도 언젠가 나를 기억할 사람이 없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이름값 혹은 정체성에 집착했었는지 모른다. 제사는 불필요한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아니다.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나를 기억해주면 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과연 누가? 숨죽였던 눈물이 그만 쏟아져 내렸다. 해맑게 웃으며 영화를 보던 아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왜 울어하며 놀라서 당황한 표정. 나는 괜찮다고 다독였다. 그냥, 이 순간이 아이의 기억 속 한 토막이었으면 좋겠다. 엄마와 울고 웃으며 영화 봤던 일화로.
자다 말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왜 우냐고 물었더니, 엄마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하네요.
홀로 남겨질 것에 두려움이겠죠.
세월이 흘러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고, 누군가에게 잊혀질까 불안해질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의 눈물을 떠올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