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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Feb 14. 2018

미혹들

마 전 뜨거웠던 이슈는 A와 B의 성폭행 사건이다. B는 A로부터 유사성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A는 성관계로 이어질 만한 여러 정황과 동의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이미 재판으로 결론이 난 상황에서 -A는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후자의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기사와 댓글엔 여러 가지 해석과 추측이 회자됐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성이었고, 특히 B의 경우 남자 친구가 있을뿐더러 한 번도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B에게 의구심을 제기할 만한 여지가 없으나, A는 뭔가 석연치 않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는 그 사건의 판결을 반박하거나 A에게 어떤 동정심을 발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설사 뭔가 있었더라도 A는 명백히 범죄자다. 심증으로 하고 싶은 대로 상대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B의 눈물과 힘겨운 사연을 위로하는 방식이라 해도 잘못됐다. 진위는 밝혀졌건만 A는 거부할 수 없이 자연스러웠던 기운과 분위기를 언급한다. 믿기 어려운 미혹의 여지를 뉘앙스화한다. 흔히 미혹은 무엇에 홀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 혹은 헷갈려 갈팡질팡 헤매는 기분을 말한다. 상호적인 교감보다 다분히 일방적으로 흐를 때가 많다. 상대방의 유혹으로 이끌리는 거나 나만 빠져든 자기합리화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에 단골 소재인 구미호 이야기 속엔 그녀를 거부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남자가 등장한다. 드라마 속에선 존재의 차이를 극복한 지고지순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니까 대단한 순정남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금을 울리는 그 사랑은 엄밀히 말하면 눈치 없이 매혹된 것이다. 그는 정체를 숨긴 비밀스런 그녀에 팔불출처럼 끌려 다닌다. 그녀의 외모와 조신한 태도에 반해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언젠가 이루어질 자신의 욕정에 대한 기대가 있다. 백일이 언제인지 날마다 묻곤 하는데 그러다가 마지막 하루를 잘못 계산해서 맥없이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그녀의 진면목이나 희망사항을 끝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희생과 포용이라는 사랑을 이해하기 전에 자기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했으나 이루지 못한 한이 남아 평생 허무할 운명이다. 결국 그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미혹에 사로잡힌 것이다. 



미호의 남자는 아름답고 강렬한 유혹이 가슴 한 구석을 파고들어 낙인처럼 새긴 연정을 미혹이라 여겼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심리를 모르고 미혹 자체에 의미와 기대심리를 부여하고 착각했다. 그 속엔 이기적 당위, 그녀를 보살피고 원하는 대로 해줌으로써 나중에 보상받을 것이란 조건적 호혜 관계를 은연중에 깔고 있었다. 자본주의 잣대론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다만 인간의 마음을 앞세우는 사랑의 도리 앞에서 그건 왠지 꺼림칙하고 소름 끼친다. 더군다나 그만의 확신이었으니 더 그렇다. 어떻게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상대방의 미혹으로 밀어붙일까? 그럴수록 그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안타깝게도 구미호의 내러티브 속엔 심층적인 반성이나 성찰이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혹 뒤에 숨어버린 암울한 탐닉과 욕망에 대해선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는 게 나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히스테리한 인간은 영화 <휴먼 스테인(2003)> 속에도 있다. 주인공 ‘콜만’은 한때 저명하고 존경받는 학자였다. 마치 강간 유죄판결을 받기 전 A-사건 이후 취소되기 전까지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수상할 정도로 촉망받는 감독이었다-처럼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매력의 여인 ‘퍼니아’를 만나고 불꽃 튀는 사랑에 빠진다. 많은 이에게 실망과 지탄을 받고 급기야 그녀 전남편의 살벌한 추격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한다. 표면적으로 그의 미혹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이란 등식을 성립하는 것 같다. 한편으론 구미호의 남자처럼 사랑에 관한 자기합리화 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딘가 속삭이듯 출몰하는 의문은 감춰진 그림자를 향해 점진적으로 파고든다. 나무랄 수 없이 완벽했던 그에게 예상 밖의 반전 같은 미궁과 진실이 있었다. 그 조짐은 강의 도중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인종차별에서 시작됐다. 순간적인 실수로부터 뜻하지 않은 비난을 받게 하고 나아가 자질 논란에 휘말려 교수직을 파면당했다. 급기야 충격을 받은 아내는 심장마비로 돌연사했다. 혼자 남겨진 그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젊고 방탕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 모든 것이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행방과 달랐기에 일탈과 방황이라고 손가락질받았다. 허나, 그 실체가 거짓된 모습에서 출발한 것이고 진실을 숨겨왔던 거라면 뭐라고 할 수 있었을까? 



에 대한 진실은 오랜 세월 간과했던 정체성에서 시작됐다. 유색인종에 대한 무자비한 발언은 사실 이율배반적인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백인 같은 외모였지만 실제론 흑인의 핏줄이었다. 가족을 숨겨야 했고 더군다나 사랑하는 여인에게 조차 말하지 못했다. 자신을 숨기고 겉에 보이는 모습에 부합되는 삶을 살기 위한 그의 선택은 속임수였다. 자기부정과 기만, 아이러니한 삶을 살았던 내면이 감당하기 힘든 지경까지 참다가 어느 순간 자기통제를 벗어났다. 그동안 만들어놓은 거짓 모습에 염증을 느꼈던 것일까? 흑인을 향해 거침없이 비난했던 건, 흑인이란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의 삶을 탐닉한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는 자기모순 속 자기를 부정했다. 나아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탈을 감행했다. 자신과 완벽히 대치 상태에 있는 ‘퍼니아’에 이끌렸다. 그녀는 완벽한 백인의 모습이자 여자였고 생활고에 시달린 불후한 환경 속에서 비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통해 왜곡된 자아를 일깨움으로써 또 한 번 자기부정을 이룬다. 즉, 진실을 향한 행보는 백인 행세를 하는 자기부정과 자신과 정반대의 모습이나 진실을 숨기는 그녀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고해성사로 향한다. ‘헤겔’의 변증법처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기모순으로 첫 번째 자기를 부정하고, 그 속에서 부정된 자기와 대립 상태의 무언가로부터 두 번째 부정으로 접근한다. 여기서 자기 왜곡과 모순과 부정은 양면적이고 다면적이다. 본질을 숨긴 채 그동안 쌓았던 체계를 이룩했으나, 억눌림이 분출하는 순간 굳건하고 견고한 명성을 무너뜨린다. 굴절된 현재를 밀치고 감춰진 과거를 인정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의 미혹은 거짓된 삶에 적응한 줄 알았지만 늘 의문스러웠던 반동이다.



고지순했던 구미호의 남자는 진실을 몰랐다. 가면을 쓴 위선자 ‘콜만’은 진실을 감췄다. 다른 성향의 그들, 그렇지만 모두 미혹에 빠졌다. 치명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몸짓과 외모에서. 그 속엔 음흉한 미혹의 비밀이 있었다. 미인이라 신뢰할 수 있는 고정관념, 백인이 우월하다는 잣대나 논리. 전자는 착각했고, 후자는 부정의 부정을 거듭한다. 미혹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인간은 윤리나 양심으로부터 물러나 있다.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자기합리화에 빠진다. 그럴듯한 심증으로 기웃거리나 진실을 외면한다. 수많은 의심과 자기 방어나 책임 회피 속에서 변명을 방패 삼아 숨어버린다. 가끔 엇나간 방향으로 의도치 않은 짐작과 거짓, 가식, 악랄로 나간다. 






미혹은 억측이 내재된 가능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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