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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Mar 19. 2018

솔직할 수 없는지

                                                                       표지 : 앤서니 브라운(Anthony Edward Tudor Browne) 作 



중했던 외모나 특유의 친화력을 닮아야 했는데 불행하게 그런 건 모두 비꼈다. 나는 아버지의 단점을 쏙 빼다 박았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제 멋대로인 성향의 소유자였다. 예를 들어 함께 보는 TV 채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바꿔야 직성이 풀렸다. 일찍이 가장 노릇을 해온 그는 당신의 희생과 가족의 복종을 등가로 집안 곳곳에서 군림했고, 내 딴엔 그게 아집처럼 보였다. 가끔은 소중한 가족을 위해 양보해도 되지 않을까? 신경전이 불편했던 어머니나 할머니는 오히려 내가 삐딱하다고 타박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내가 아니었다. 마음 한편에 묻었다가 적당한 기회를 틈타 역공했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았잖아, 왜 어머니만 맞춰줘야 해, 이제부턴 아버지가 좀 맞춰줘요…등등. 그는 대개 역정을 냈지만 괜히 비꼬기도 했다. 괜히 어머니가 카카오톡이나 한다고 타박하면서, 세상이 변하니 늙은이가 젊은 애들 따라가야 하냐고 혀를 찼다.  



던 좋던 변화에 동참하는 건 독불장군에겐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불만이 쌓였고 뭐든 시작하기도 전에 겁났을 것이다. 남들 보기엔 호탕했던 아버지도 조금씩 냉소적으로 변했다. 몇 년에 한 번씩 병원 신세를 졌고, 얼마 전엔 급성으로 호흡곤란이 왔다. 간단한 시술이었으나 생존 여부를 놓고 본다면 긴박했고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 탓에 그동안 수백 가지 변명으로 합리화했던 술, 담배와 과감히 절교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결별과 물귀신처럼 따라온 금욕은 그의 마음 깊숙이 생채기를 낸 모양이었다. 시시콜콜했던 볼멘소리는 비관을 넘어 비수 같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조심할 거 투성이인데 여생을 어떻게 하라고? 잠을 이루지 못했고 제대로 먹지 못했다. 걱정하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아버지 놀러 오세요 하고 전화 한 통 넣었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몰골이었다. 오자마자 소파에 축 늘어져 꼼짝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자고 해도 힘들다며 미뤘다. 이내 시큰둥한 공기가 감돌고 새어 나온 침묵이 온 집안에 흘렀다. 안달이 난 어머니가 큰 애를 붙잡고 어르고 달랬다. 억지로 끌려간 그는 잠시 후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워버렸다. 모두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울증이 아니냐고 걱정했고,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예전 같지 않아 당황했다. 나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맞추겠다 결심한 터라, 쫓아다니고 챙기며 눈치를 봤다. 뭘 해도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위의 피로감이 쌓였다. 아주 나쁜 생각까지 들어 그의 행동이 마치 응석처럼 느껴졌다. 함께 있는 공간이 그렇게 숨 막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녁도 먹지 않고 가겠다는 고집을 두말없이 알겠다고 응수했다. 한편으로는 그 결정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동생과 통화하다가 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내 말의 뜻을 바로 알아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고집을 겪어왔던 우리에겐 일종의 묵은 체증이 있었다. 회를 못 먹어도 그가 원한다면 횟집에 가야 하고, 여행 한번 가려면 까다로운 눈높이 맞추느라 등골이 휘고. 그런 류의 에피소드는 수도 없어서 대화 도중 과도한 감정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늘 까다롭고 그 비위를 못 맞추면 우리가 잘못한 듯 눈치를 준다고 투덜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자기중심적인 걸 고집해 가족을 힘들게 만들지 말자. 그걸 모르는 그와 반대로 행동한다면 욕 듣는 따윈 없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 생각에 골몰하는데, 뜬금없이 ‘뫼르소(<이방인> 주인공)’의 행동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자 이제 드러누워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생각하곤 기뻐했던 모습이. 뭐 이런 정신 나간 애가 있냐고 생각했는데, 좀 전의 나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예민한 아버지가 피곤했던 나머지 돌아간다고 했을 때 기뻐했던 나와.    



각해보면 누구나 그럴지 모른다.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울면서 먹고 마시며 웃었던 게 생각났다. 그리움과 슬픔에 흐느끼면서도 피곤함을 느끼고 배고픈 몸을 인지했다. 그렇다고,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대부분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곧이곧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아버지 간다는 소리가 반가워도 애써 내색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든 부모를 부양할 것이냐 묻는다면 자식의 도리를 다할 것이라 대답한다. 괜히 속 마음 따위를 밝힐 필요 없다. 어떤 의혹에 휘말리기 싫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해야 할 것과 생각하는 것의 괴리를 인지하고 판단하며 절충안을 찾아 행동한다. 비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까지 지킨다. 성경이나 학교에선 거짓말을 해선 안되지만 배웠지만,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특히, 사랑이나 가족의 문제 같은 건 공식처럼 그래야 하는 관습들이 있다. 가능하다면 늙은 부모를 부양해야 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욕망 대신 희생할 줄 알아야 하며, 결혼 후 마음이 가는 다른 이성에 눈 돌려선 안된다. 이성이나 도리 대신 종종 육체적 욕구에 밀린다면 비정상과 부도덕 사이를 오가게 된다. 사이코패스처럼 반사회적 성격 장애와 다를 바 없다.  



나친 솔직함은 때론 자신을 향한 방아쇠가 된다. 거짓이 아닌데 오해가 되는 불합리한 아이러니로 돌아온다. ‘뫼르소’는 어머니를 사랑했냐는 질문에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하거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덤덤하게 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슬픔을 보이긴커녕 지나치게 냉정해 보였다. 자식으로서 보여야 할 절대적인 기대치를 벗어나자 그게 불씨가 됐다. 세상은 마녀사냥 식의 분노를 터트렸고 그릇됐다고 판단했다. 패륜아에 대해, 법은 자기방어 차원에서 저지른 살인을 계획하에 벌인 것으로 치부했다. 그 과정 속에서 윤리나 제도도 합리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거짓말을 해서라도 감추는 게 낫다. 오해받지 않기 위해 회피한다. 그건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숙련이다. 그런 사람은 되도록 도덕적 위험 수위를 넘보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단호하고 엄격하다. 괜히 헷갈리는 것보다 극단적인 게 편하다. 나는 그런 류인 것이다. 종종 아버지가 불편했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꼬집곤 했다. 효녀인 척 굴지만 내면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진심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걸 과거의 억울함과 합리화로 바꿔치기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뒤통수를 긁적이며. 괜한 오해를 사서 밉보일까 두렵다. 어머니와의 애틋함이 없는 ‘뫼르소’처럼 매정한 구석이 있는 내가 행여 동류로 찍혀 비도덕적이란 낙인이 찍힐까 조심스럽다.  



는 아버지를 타산지석 삼아 그와 다를 것이라 장담해왔다. 그 자부심이 마치 그를 암암리에 비난해도 될 특혜인 양 굴었다. 나는 아버지를 우롱할 자격이 있나? 이 또한 이기심 아닌가? 오히려 그는 자기중심이나 솔직하다. 모든 걸 꿰뚫는 듯 구는 내 우쭐함 같은 건 없다. 응석도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것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아닌 가족이니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게 못마땅한 거라면 차라리 이해하고 참을 수 없는 걸 솔직히 인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선의의 거짓말로 포장하는 대신 비슷한 이기주의자로서 반박과 포용에 대해 밝혀야 할지 모른다. 당신의 지난날 남긴 상처가 지금의 당신을 이해하는데 방해하고 있다고. 미안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고. 그간 앙금을 풀어내고 삐딱함이 긍정적인 응원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의문이라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바탕 충돌하고 풀어버리는 게 나을지 모른다. 



상은 ‘뫼르소’가 비정상이고 그러면 안된다고 여긴다. 뭐든 직설적으로 내뱉지 말고 자신이 느끼는 게 남들과 다르다면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문뜩 출몰하는 억울과 반항을 억눌러야 한다고. 그게 옳은지 헷갈린다. 때론 솔직함 대신 거짓 웃음을 보이게 되니까. 박쥐처럼 이럴 땐 솔직하고 저럴 땐 눈 가리고 아웅 한다면, 이미 모순이지 않을까? 혼란한 인간은 부조리하다. 차라리 반대편을 모르는 독불장군이나 이기주의자는 단순하고 확고하다. 어떤 게 옳은지, 가끔 단정 짓기 어렵다. 때마침 아버지의 쾌차 소식이 나를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렇지만, 언제고 또 그런 상황에 놓일 것이다. 지금의 고해성사가 나를 변하게 할까? 흉금을 속 시원히 풀어낼지 아니면 웃는 얼굴로 험담 할는지.  





 종종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끄는 존재가 있습니다.
 피해야 할 게 아니라 극복해야 할 무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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