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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Apr 11. 2018

왕관을 쓴 치아

이와 젤리를 먹다가 왼쪽 아랫니에 박은 레진이 깨졌다. 음식물을 씹을 수 없으니 치료가 불가피해졌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치과는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곳이었다. 아파서 갔는데 눈 가리고 뭐가 들어오는지 모른 채 다짜고짜 입 안을 쑤셨다. 의사는 충치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까지 샅샅이 파헤친 후 무자비한 결말로 경고했다. 그 단호한 말발에,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란 내 다짐도 무용지물이 됐다. 금세 꼬리를 내리고 그가 하사한 은혜로움에 압도돼 생돈까지 갖다 바쳤다. 돌아서면 왠지 강탈당한 느낌으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 위생 강박과 더불어 무결점을 향한 강요가 치과에 대한 내 고정관념이었다. 지난날을 되돌아봐도 충치 한 두 개로 끝난 적이 없었다. 못하겠다는 날엔 오만 가지 이유를 붙여 몰상식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 어쩔 수 없는 동의에 인심 쓰듯 스케일링을 서비스로 붙였다. 될 수 있으면 갈 일을 만들지 말자는 게 내 지론인데, 이번에 그냥 넘어갔다가 더 나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진 부위는 설상가상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의사 말로는 예전 레진을 씌운 부위에 세균이 번식하고 있었으므로 치료가 불가피한 상태라고 했다. 깨진 곳을 제거하면 원래의 치아는 밑 둥만 남게 되는데, 그 경우 레진이나 인 레이는 무용지물이었다. 크라운으로 왕관을 쓰듯 완전히 덮어씌워 단단히 고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왼쪽 머리에 망치 하나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왕년의 스타가 50세 이전 치아 보험에 가입하면 개수에 상관없이 보장한다던 바로 그 크라운이었다. 그 뉘앙스로 보자면 더 이상 씌우는 것이 불가능할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충치 치료의 최상위 버전쯤 되는 것 같았다. 몇 백만 원한다는 임플란트와 비교하자면 천만다행이었지만, 어쨌든 제 기능을 잃고 지 몸보다 더 큰 가짜를 평생 달아야 할 운명이었다. 어두워진 내 표정을 살피던 의사는 요즘 나오는 치아가 얼마나 진짜 같은지 꼼꼼히 비교하기 시작했다. 최근 개발된 건 속과 겉까지 치아 색으로 맞출 수 있다. 진짜 이빨과 똑같을 뿐만 아니라 십 년 이상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가 치아의 외관을 복원하는 최적의 치료법에 열을 올릴수록 진짜 같은 가짜에 방점을 찍는 격이었다. 별다른 대책이 없는 걸 이해했지만, 그의 설명에 맞장구를 치거나 감쪽같은 가짜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진 않았다. 크라운은 기존의 치아에 씌우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원래의 모습을 잃은 생니가 새로운 외형으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특별히 염두한 적이 없었으므로 더욱더 미적지근할 뿐이었다. 



택의 여지는 없었다. 결국 크라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심만 하면 청산유수같이 내뱉던 의사의 말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다. 내 것이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마취를 하고 충치 치료를 한 후, 이빨의 본을 떴다. 새로운 가짜 치아가 나오기까지 몇 주를 기다렸다. 원래의 이빨에 맞춰 여러 번 다듬고 붙여봤다. 레진이나 인레이처럼 곧바로 붙이지 않았다. 임시로 해놓고 사용한 후 이상 없다고 판단될 때 완전히 굳혔다. 선택과 과정의 편차마저 불편했던 나는 왜 뜸 들이냐고 따졌다. 그들은 추가 치료가 있을 수 있으니 한동안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기엔 물리적인 시간도 필요했던 것이다. 반쪽짜리 생니 위에 묵직한 크라운을 얹었다. 나중에 다시 빼고 붙일 수 있게 걸림 쇠를 제거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생니가 아니라 혀였다. 말을 하고 음식을 삼킬 때마다 혀가 날카로운 끝에 찔렸다. 무료했던 일상에서 일종의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걸 습관적으로 갖다 대고 껄끄러운 이물질과 실랑이를 벌였다. 낯선 대상에 대한 따뜻한 환대가 아니라 선 긋기였다. 혀가 걸림 쇠와 실랑이를 벌일 때, 생니는 묵직한 가짜 치아를 받아들이고 쪼여지는 압박감을 감내했다. 잇몸이 부었고 양 옆의 이빨은 자기 자리를 고수하는 듯 필사적으로 버텼다. 무언가 이물감이 느껴져 치실을 사용하려 했으나 한치의 빈틈이 없었다. 크라운의 위용은 번쩍이는 흰색 투구처럼 단단함으로 나머지를 압도했다. 나는 씹을 때마다 일부러 피했다. 음식물이 걸린다면 쉽게 빼낼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러다가 괜히 홀라당 벗겨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오른쪽 치아들은 갑자기 밀려오는 일거리로 과부하 상태였다. 턱관절이 아팠고 씹는 게 귀찮아 끼니를 걸렀다. 그렇게 가짜 치아는 제 구실을 해 보기도 전에 은연중에 방치되고 있었다.  



리 모두 한통속이 되어 크라운을 따돌리고 있을 무렵, 생니는 홀로 이중의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양반집 부인네 같은 가체를 얹고 반 토막의 몸뚱이로 반대편에서 넘어오는 음식물의 즙과 풍미를 느끼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는 신경과 뿌리가 그것을 음미하고 전두엽에 신속히 전달했다. 자신의 역량이 죽지 않았음을 호소했다. 어쩌다가 과자 하나가 왼쪽으로 넘어가자 민첩하게 기지를 발휘했다. 부담스럽던 원흉에게 씹어보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처음으로 합심해 과자를 씹었다. 헐떡거릴 줄 알았는데 뻑뻑한 톱니처럼 겨우겨우 부셔냈다. 일단 성공적이었다. 한번 해봤으니 그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시험해보기 위해 여러 가지를 들여보냈다. 부드러운 모닝 빵부터 오도독 씹히는 사탕, 쫀득한 젤리도 과감하게 도전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차근히 과제를 수행했다. 생니가 질감을 기억하고 신호를 보내면, 크라운은 경도에 따라 씹기를 조정했다. 가끔 차가운 물이나 아이스크림이 들어올 때, 후자가 어떤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냉큼 달려들기도 했다. 신경의 접합을 완벽히 찾지 못한 전자는 고통스러운 시림을 감내했다. 둘의 합일을 맞추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껴 맞춰야 했다. 너트와 볼트가 여러 번 끼우고 조이는 사이 맞물려서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그때, 나는 충분히 전자를 배려하지 못했다. 무자비하게 적응할 것을 지시하고 거침없이 음식을 쏟아냈다. 내가 전자를 밀어붙일수록 후자와 한통속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찰떡궁합처럼 뭉치길 바랬다. 나를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선택했고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얼음을 오도독 씹을 수 있을까? 생니와 크라운은 감쪽같이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사실 나는 크라운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그건 단지 낡고 닳아버린 원본 위에 덧씌운 허울이었다. 하얗고 나무랄 데없이 완벽해 보였지만, 그 속에 진짜가 있었다. 숨기고 싶은, 드러날까 두려운, 변형된 원본이었다. 나는 그걸 감추는데 급급했고 온 신경을 골몰했다. 밝혀진다면 세월의 흐름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내 일부가 쓸모 없어져서 점차 젊음의 반대쪽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노화란 되돌아올 수 없는 레테의 강에 우연히 발을 담그게 되는 건지 몰랐다. 내딛다 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휩쓸려 한순간 훅하고 저만치 밀려났다. 푸릇푸릇하고 한창 꽃 피웠다가 조금씩 꽃잎 같은 신체 일부가 떨어지고 시들어가는 인생은 말 그대로 드라마 속 은유였다. 처음이라 어색한 것일까? 흰머리 하나에 속상해하고 염색하지 않고선 외출하지 않는 엄마를 보면 꼭 그렇지 않나 보다. 어떤 나이 든 젊음의 반대말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평생 늙지 않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썩은 이빨처럼 갑자기 나타난다면, 일반적인 생체 주기를 무시하고 불쑥 찾아온다면, 그렇게 억울할 수 없다. 쇠퇴의 흔적을 내 몸 어딘가에서 하나라도 수용하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운이라는 말 자체에 자존심이 상했다. 원본과 구분할 수 없어도 가짜는 가짜였다. 대안 없는 강요된 선택으로 생니와 크라운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하나가 되기 위한 소모적이나 필연적인 시간을 겪었다. 과정보다 마음이 앞섰고 불편했다. 노화의 흔적을 대체제로 눈속임하는 게 못마땅한 줄 알았다. 하드웨어가 못 받쳐주는데 소프트웨어의 기가 꺾이지 않았다. 인정하지 않으려면 내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체의 적응력은 놀라웠고 자아는 투덜대면서도 한 발짝씩 따라갔다. 거부에서 의심과 자포자기를 거쳐 단련되고 익숙해졌다. 원본이 훼손된 순간 잠시 주춤했지만 곧 강구책을 마련하고 순응했다. 생니와 가짜 치아는 합일을 이뤘고, 어디가 진짜이고 가짜인지의 경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뿌연 안갯속 고민이 사라지고 순화된 공기로 채워졌다. 진짜 같은 가짜는 때론 일말의 의심까지 날려 보낸다. 이제 와서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인가 자문한다. 변덕과 망각의 인간이여! 그것도 인간의 본성이라 어떤 식으로든 살다 보면 살게 되는 모양이다. 인생은 젊고 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남는가의 문제였다. 나는 이빨 하나에 근원적인 이치를 또 한 번 통감하고 있었다.  






걸림 쇠마저 제거한 크라운은 언제 불편했냐는 듯 완전한 치아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적응하기 위해 인내했던 시간이 가물가물해졌습니다.
지금은, 씹을 수 있어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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