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수많은 순간에 대하여
존경하는 선배가 한 명 있다.
선배라고 하기엔 많이 친해서 이제는 형에 가깝다.
내 브런치 글에 정말 많은 영감을 주는 형인데, "화는 방귀 같은 거라 한 번 트면 참지 않는다." "잡초 하나가 밭을 다 망치네, 회사랑 똑같구만." 등 툭툭 뱉는 주옥같은 멘트로 나를 감탄하게 만든다.
내가 대리 직급 일 때, 이 형은 같은 팀 과장으로 입사했고, 나의 회사 선배 포지션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인상은 별로였다. 느릿하고, 여유로운 행동과 말에서 풍기는 성인군자의 냄새.
'공자님이 여기 와서 왜 광고를 하고 있지?'라고 생각했다.
광고 바닥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돌아간다. 경쟁 PT, 흥행, 이슈, 승리, 쟁취, 자극, 트렌드, 유행 같은 단어들이 얽히고설켜져 있는 기본적으로 치열한 곳이다. 빠른 템포와 호흡으로 일이 진행되는 광고 바닥에서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니, 서른도 안된 대리는 이해도 못하고 답답해 할 수밖에..
물론,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생활 경험도, 인문학적인 소양도 부족하면서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했었다. 지금 형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면 책도 많이 읽고, 지적 소양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새삼 다시 느껴진다.
이 형은 범인이었다.
꽤 오래전 일인데, 퇴근 시간 다 되어 형이 술을 먹자고 연락이 왔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하며 술자리로 나갔는데, 역시 무슨 일이 있었다.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전 직장 동료가 급 번개를 잡는 이유는 항상 무슨 일이 있어서다.
"야,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함께 일하는 친구들이 그걸 모르네."
내용을 들어보니 형은 현재 광고/소셜/마케팅 운영 업무 중심의 대행사안에서 캠페인 업무를 하기 위해 크리에이티브 팀을 세팅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사실상 회사에 들어오는 신규 경쟁 PT 건이나 제안을 세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이 팀에서 다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어렵게 제안/PT해서 네임벨류도 높고, 금액도 꽤 괜찮은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캠페인 규모가 크다 보니 소셜이나 광고 운영팀 등 다른 운영/제작 관련 부서들과의 협업이 필요했다.
그렇다. 누구나 아는 뻔한 시나리오다. 다른 팀이나 부서에선 '일할 사람이 없다.' '바쁘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업무 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회의에 참석한 임원진(회사 No.2)도 다른 부서의 리더들에게 회사에서 꼭 해야 하는 프로젝트라고 나서서 말을 거들었지만 태도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형은 "아 뭐,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하면 되죠. 다들 바쁘고 사람 없으시다는데.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회의를 끝낸 후, 바로 나에게 술 먹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쎄~한 느낌이 들었다.
이 형이 범인이었다.
형 답지 않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과 비교하면 상상 이상으로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황을 고려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 배려심이 아니다. 눈치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을 이용하지 못한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다.
그런데 표출해 버린 감정 때문에 졸지에 화가 많고, 강압적이고, 독단적이고, 회사 직원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일만 가져오는 범인이 되어버렸다.
'형이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했다', '형이 틀렸다'가 아니다. '사람들이 형에 대해 오해하겠다'는 말이다. 순간 감정적으로 뱉은 한마디 때문에 말이다.
나는 일을 할 때 일 자체에 감정을 넣고, 진심을 다해 일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일이 잘 되었을 때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이 성취감이 원동력이 되어 다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일을 하게 되니까. 그리고 일이 잘 안 되었을 때 나름 힘듦과 반성이 동반하면서 내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이를 표출하는 것에는 최대한 지양하려고 한다. 물론 나도 천성이 욱하는 성격이라 항상 지키지는 못하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누르고 머리를 차갑게 하려고 한다. 아마 순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을 때보다, 덜어냈을 때 내가 후회를 덜 했기 때문이 아닐까.
밤에 잠자기 전 침대에 누웠을 때 '아,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가 생각나는 것이 '아, 그때 그 말을 왜 했지?'가 생각나는 것보다는 덜 힘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