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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자 Jan 10. 2021

게임 속으로 여행.

나는 여가시간을 조용히 보내는 편이다. 그래서 주로 책을 읽거나, 산책을 가거나, 영화를 보더라도 가족영화나 로코를 본다. 게임도 RPG나 아케이드 같이 여럿 즐기는 한국형 게임보다는 혼자 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최근 한 게임들을 돌이켜보면 숫자 퍼즐, 체스, 스도쿠, 슈퍼마리오 같은 게임이다. 의미 있고, 아름답고, 예쁜 비주얼만 즐기는 타입이다. 최근에는 이런 취향을 적극 반영한 게임을 두 편 흠뻑 즐겼다. 내게 그 시간은 여행이었다. '동물의 숲'과 '스타듀 밸리'다.


나에게 여행이란 그 세계의 산책이다. 가장 쉬운 여행으로 동네 탐방이 있는데, 가령 연희동을 가면 가려는 상가뿐 아니라 그 주변의 주택가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동네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일지, 내가 여기 산다면 토요일 아침은 어느 카페를 갈 것인지, 탐험하고 상상한다. (머리가 조금 굵어진 요즘은 임장의 개념도 같이..) 해외여행도 마찬가지로 지역 단위로 동네 분위기를 감상하고 다니는 편이다. 특히 학교 주변이나 공원, 그리고 슈퍼마켓에 가보는 걸 좋아한다.

내 인생 최장기간 여행 : 바르셀로나 교환학생

대단하게도 '동물의 숲'과 '스타듀 밸리'는 나 같은 산책 마니아가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동물의 숲과 스타듀 밸리는 답이 정해져 있고 그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게임은 아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눌러보면서 숨은 아이템, 숨은 퀘스트, 숨은 맵(그리고 숨겨진 돈벌이)을 만나고 확장해나가는 게임이다. 스토리가 단지 부자가 되는 타이쿤 게임(아이 러브 커피 같은)이었다면 이런 리뷰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동물의 숲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 무인도를 개척하며 유유자적하는 슬로 라이프가 콘셉트인 게임이다. 올해 집콕 트렌드를 리드했던 게임으로 여기저기서 회자됐는데, 코로나의 영향으로 집콕하는 시간이 확대되는 시기에 시의적절하게 발매되면서 폭발적 흥행을 가져온 작품이다. 필자는 닌텐도 스위치가 아직 없어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무려 2007년, 그러니까 13년 전에 이 게임에 환장했던 꼬마였고, 동숲이 르네상스를 맞는 모습을 보며 다시 나의 13년 된 닌텐도 DS 버전의 '놀러 와요 동물에 숲'에 빠져있었다. (동물의 숲은 2001년 처음 발매된 게임이라고 한다..!)

정원 꾸미기
농사짓기
바이든&해리스 캠프 동물의 숲 버전..

동물의 숲은 마을 상인 너굴씨로부터 대출금을 갚아가며 집의 규모를 키워가는 게임이다. 그 과정에서 낚시, 곤충채집, 화석/유물 발굴, 농사 등등으로 돈을 벌고, 마을과 집을 꾸미고 동네 주민들과 교감하는 게임이다. 3D가분수 캐릭터들과 마을의 모습이 정말 귀엽고 아름답다. 깨알 같은 디테일이 담긴 가구나 곤충/물고기 그리고 환경이 정복 욕구를 불태운다. 하지만 1년 정도 사이클을 돌고 나면 너무 유유자적하는 나머지 슬슬 질리기 시작하는 게 아쉬운 게임이다. 마을 주민들의 대사도 변주가 있기는 하지만 열심히 대답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프스타일에 어떤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동물의 숲은 비주얼과 아기자기한 콘텐츠가 압도적인 매력포인트지만, 한편으로 스토리라인의 개념이 희박하다. 정말 신나는 산책을 구현한 게임이다. ('놀러 오세요 동물의 숲' 기준. 나무 위키를 보니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도 이 부분 개선이 없는 모양이다.)

마을 NPC들



스타듀 밸리


스타듀 밸리도 마찬가지 콘셉트이다. 이 게임은 2D 픽셀 아트로 된 귀염 뽀짝 디테일 넘치는 게임이다. 동물의 숲보다 숨은 맵이 많고, 직업도 다양해 돈을 버는 루트가 다양하다. 따라서 게임을 하면서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가축농장 전문 경영인이 돼서 치즈나 마요네즈를 판다던지, 송로버섯 재배를 전문으로 한다던지, 재배한 농작물로 피클이나 술을 만들어 판다던지 등등. 직업군이 상당히 세분화되어있다. 또 가꿔나가기에 따라 흙밭이었던 농장을 도시의 모습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이미지 안의 돈벌이 수단들 : 닭,  오리, 염소, 소, 벌꿀, 옥수수, 호박, 크랜베리
낚시하는 모습
광산에서 광물 캐기
바닷가 축제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여러 NPC와 교류하고 사귀며 그 마을 사람으로 살아가는 점을 잘 구현했다. 사연 있는 마을 사람들과 다양하게 교류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을 수 있다는 점이 차별화 요소다. 친목 게이지가 채워지는 단계별로 나누는 대사도 다르고, 이벤트도 다양해 특수 아이템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기혼자와 결혼할 수 있는 막장 드라마까지 가능하다.. NPC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시장님은 농장 아줌마와 비밀 불륜을 하고 있고, 농부가 꿈이었던 목장 주인, 광부로 일하다 다이너마이트로 다리를 다친 노인, 재혼가정, PTSD를 겪는 참전 군인, 그리고 거대 자본과 마을 영세 상점의 갈등구도까지 있다. 이 안에서 내 선택대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게임이 질릴 때까지)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것이다. 동물의 숲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의 여행이다. 동물의 숲이 동네 산책이라면, 스타듀 밸리는 교환학생 같은 느낌이다.

스타듀 밸리 개발자인 에릭 바론은 이 게임을 혼자 4년 동안 개발했다고 한다. 에릭은 시애틀 근교의 시골마을 컴퓨터 공학도였는데, 취업이 잘 되지 않아 극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스로의 개발 실력을 키우기 위해 Harvest Moon이라는 목장경영 게임을 모의로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발전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게임의 그래픽, 음악, 스토리 모두 혼자 만든 작업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게임의 발전 가능성이 보일 때마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를 반복하면서 현재의 생태계(?)를 구현하기에 이른다. (게임 속에도 본인 같은 캐릭터를 넣어뒀다. 지하실의 외로운 개발자 세바스찬) 스타듀 밸리 게임의 결말이 없는 것처럼, 본인도 이 게임이 끝없는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Eric Barone

픽사 CEO 애드 캣멀은 실패 경험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실패 경험이 아이디어의 불쏘시개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픽사 직원들이 일하는 시간의 100 중 단지 3의 시간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한다. 97의 시간은 3을 위해 헤매는 시간인 것이다. 토이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업..  모두 캐릭터들의 결핍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 모습이 창작자를 닮았고, 또 시청자를 닮아 공감을 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듀 밸리의 사연 많은(?) 게임 캐릭터는 플레이어를 더 몰입하게 한다. 어쩌면 에릭 바론의 한정된 자원에서 뽑아져 나온 진액이기 때문에 그걸 닮은 작품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2020년 마지막 10일을 스타듀 밸리에 쏟아부었던 것 같다. 덕분에 요통이 끊이지 않는 요즘이다. 에릭 바론 덕분에 좋은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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