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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May 28. 2023

마야 문명과 스페인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유카탄 반도의 심장, 바야돌리드


바야돌리드 거리 (사진: @숲피)


2012년 마법의 마을로 선정된 바야돌리드 (Valladolid)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있는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다. 스페인 도시 바야돌리드가 이베리아 내륙에 있는 것처럼, 멕시코 바야돌리드 또한 유카탄 반도 내륙 지역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1543년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 건축물이 잘 보존된 곳으로 제법 큰 규모에 비해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또 세계 7대 불가사로 꼽히는 치첸잇자 (Chicen Itza) 피라미드가 버스로 불과 50분 거리에 있어 많은 여행객들이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4박 5일 일정으로 바야돌리드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은 “날씨 너무 더운 거 아냐?”였다. 유카탄 반도는 일 년 내내 덥고 습한 날씨로 유명한데, 특히 바야돌리드는 내륙 지역에 있어 칸쿤보다 훨씬 더운 느낌이다. 과거 스페인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습도, 더위, 그리고 모기 때문에 바야돌리드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고려할 정도였다.


산 세르바시오 성당 (사진: @숲피)


바야돌리드는 다른 많은 멕시코 도시와 마찬가지로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다. 도시 한가운데는 프란시스코 칸톤 로사도 (Francisco Canton Rosado) 광장이 있고 그 앞에는 두 개의 탑이 우뚝 솟은 산 세르바시오 (San Servacio) 성당이 있다. 과거 스페인 사람들은 신대륙 도시 중심에 항상 광장과 성당을 가장 먼저 세웠는데, 그 당시 종교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야돌리드에서 제일 힙한 곳을 고르라면 단연 수도승들의 거리 (Calzada de los Frailes)를 꼽을 수 있다. 중심 광장에서 두 블록 떨어져 있는 이 거리는 과거엔 산 베르나르디도 수녀원 (Convento de San Bernardino)을 잇는 역할을 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노랑, 분홍, 하늘, 주황색 등 각자 다른 색깔로 칠해진 집들이 눈길을 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알록달록한 색들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계속 사진을 찍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풍긴다.


바야돌리드란 이름


유카탄 반도 지도를 살펴보면 마야어로 지어진 마을 이름이 유독 많다. 바야돌리드 주변만 살펴봐도 약스나, 엑발람, 치첸잇자 모두 고대 마야어 명칭 그대로 사용하는 걸 알 수 있다. 과거 이 지역이 얼마나 많은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바야돌리드 시내 (사진: @숲피)


바야돌리드 또한 과거엔 마야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다. 바야돌리드란 이름이 붙이기 전 이곳은 자씨 (Zaci)라 이름 붙은 마을이었는데, 바야돌리드 안에 있는 세노테의 이름이 자씨이기도 하다. 자씨는 주변 치첸잇자를 비롯한 마야 문명이 쇠락하면서 버려진 땅이 됐는데, 훗날 스페인 사람들이 마을을 건설할 때 버려져있던 돌무더기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바야돌리드처럼 스페인식 명칭이 붙은 곳은 과거 스페인 식민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멕시코시티가 되어 스페인 제국의 중심지가 된 것처럼, 자씨도 바야돌리드가 되어 스페인 문화가 퍼져나갈 수 있는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산베르나르도 수녀원


초기 식민지 시절 스페인은 마야 사람들을 자신들의 문화로 종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교육과 종교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를 위해 스페인에선 수도승이나 성직자들이 신대륙으로 넘어와 마야 사람들의 기존 문화와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꿨다.


산베르나르도 수녀원 (사진: @숲피)


바야돌리드의 산베르나르도 수녀원은 이런 스페인화, 혹은 유럽화가 활발히 이뤄진 곳이었다. 멀리서 봐도 웅장한 모습을 한 이 수녀원은 아치가 매력적이며 높은 벽 때문에 흡사 중세시대 성 같은 모습이다. 곳곳에는 오래 시간이 지난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듯 노란색 칠이 벗겨진 곳이 있는데, 이는 오히려 수녀원의 고풍스러운 느낌을 한껏 살리는 모습이다.


산베르나르도 수녀원 내부 (사진: @숲피)


산베르나르도 수녀원은 멕시코 역사에서 가장 먼저 스페인어 교육을 원주민들에게 제공한 곳, 마야 원주민들의 개종을 위해 세례를 진행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붉은색의 텅 빈 방과 복도를 관광객들이 간간히 찾고 있지만 17세기에는 상당히 많은 활동이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참고로 수녀원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프란시스코 사람들로, 유카탄 반도뿐만 아니라 중남미 대륙 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저녁만 되면 수도원들의 거리에서부터 수녀원 앞까지 진행되는 갈색 수도승을 복장을 사람들의 행진 이벤트를 볼 수 있다.


멕시코 정부와 마야 원주민들의 전쟁


1580년대로 접어들면서 바야돌리드는 스페인 식민지의 한 부분으로 완전히 종속됐다. 마야 원주민들은 조공을 바치거나 농장 일을 하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고된 환경 속에서도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절대 잃지 않았다. 특히 스페인어를 배우면서도 자신들의 고유 언어인 마야어를 계속 사용했다. 또 스페인 정복자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역사에 기록에 따르면 1547년 이미 마야인들은 스페인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카탄 반도에서 마야 원주민들에 대한 노동력 착취가 심해진 건 멕시코 독립 이후부터였다. 1830년대부터 바야돌리드 주변 지역엔 직물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마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목화를 생산하고 노동력이 풍부한 지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바야돌리드에는 1833년 아우로라 유카테카 (Aurora Yucateca)라 불리는 스팀 장비가 갖춰진 직물 공장이 들어섰는데, 이는 멕시코 최초의 산업 혁명을 알린 신호탄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직물 산업이 발전하면 할수록 고통받는 건 마야 원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목화 생산부터 공장일까지 고된 노동을 하며 사실상 바야돌리드 지역의 경제 수익 구조를 지탱했다. 일은 많이 했지만 땅을 직접 소유하지 못해 수익조차 없었고, 오직 자신을 고용한 주인을 위해 일해야만 했다. 마야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루며 자신들의 처지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길 바랬지만, 독립 이후의 삶은 바뀐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살 공원과 수녀원 (사진: @숲피)


이런 상황에서 터진 전쟁이 바로 그 유명한 카스트 전쟁이었다. 1847년에 벌어진 이 전쟁은 카스트 (Caste)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계급 때문에 벌어졌다. 한 마디로 마야인들은 인종에 따라 계급이 나눠진 현실을 타파하고자 했고, 이를 이룰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전쟁뿐이라 생각했다. 세실리오 치 (Cecilio Chi)가 이끄는 군대는 1849년 곧장 바야돌리드를 공격해 정부군을 물리치고 도시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비록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훈련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겠단 열망 하나로 멕시코 정부군에 저항해 승리를 차지했다.


멕시코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한 마야인들을 독립군이라 부른다. 독립군들은 멕시코 정부군에 맞서 바칼라르, 테피치 전투에서 승리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멕시코 정부의 계속되는 파상 공세에 결국 바야돌리드 및 여러 도시를 잃었고, 이후엔 정글로 뿔뿔이 흩어져 게릴라전을 이어나갔다. 1847년 시작된 전쟁은 무려 1901년까지 50년 넘게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마야인들은 전쟁에서 졌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문화가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해 나갔고 20세기 후반부터 정부가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며 멕시코가 자랑스러워 할 문화의 일부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바야돌리드는 겉으로만 보면 한낱 평화로운 마법의 마을이며, 도시 풍경은 수녀원, 성당, 식민지 시대 건축물들이 많아 스페인의 어느 한 도시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하지만 바야돌리드에 머물다 보면 전통 옷을 입은 사람, 마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또 상점이나 식당 이름도 마야어로 된 곳들이 많우며, 폭축 (Poc Chuuc)이나 코치니타 피빌 (Cochinita Pibil) 같은 전통 마야 음식을 맛 볼 수 있다. 이렇게 바야돌리드는 겉으로는 스페인 풍의 도시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야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마법의 마을이기도 하다.


치첸잇자


치첸잇자 쿠쿠클란 피라미드 (사진: @숲피)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바야돌리드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치첸잇자 이야기를 간단히 해볼까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피라미드가 있는 치첸잇자는 마야인들이 세웠던 수많은 도시 국가 중 하나였다. 마야 문명은 하나의 통합된 국가가 아닌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가 스파르타, 코린토스, 아테네 등 여러 도시 국가로 나뉜 것과 같았다. 치첸잇자는 기원후 1000년 경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로 발전했고, 깃털 달린 뱀의 모습을 한 쿠쿠클란 (아스텍과 톨텍 사람들에게는 켓잘코아틀이라 불리는)을 주요 신으로 섬겼다. 마야인들에겐 제일 중요한 신이었던 만큼 거대한 피라미드도 사실 쿠쿨칸 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다고 한다.


피라미드 주변에는 마야인들이 즐겨했던 공놀이 경기장을 비롯해 시장 (Mercado), 전사들의 신전, 천문 관측을 하던 엘 카라콜, 그리고 여러 작은 신전들이 있다. 치첸잇자는 다른 지역에 있는 도시 국가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인데, 전성기 때는 약 5만 명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세노테 사그라도 (사진: @숲피)


참고로 치첸잇자 안에는 천연 우물인 세노테가 있다. 16세기 초 치첸잇자 지역을 탐험한 디에고 데 란다 (Diego de Landa) 주교는 과거 마야인들이 세노테에서 자신들의 신을 위한 종교 의식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성스러운 세노테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1960년대부터 물 밑을 조사하는 발굴 작업이 진행됐는데 마야인들이 신에게 바쳤던 황금, 옥, 조개껍질 같은 수많은 보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참고로 바야돌리드 도시 안에 있는 자씨 세노테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됐으며, 심지어 사람의 뼈도 나와 세노테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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